중남미에서 '게임 엘도라도' 찾아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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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문외한이었던 정철 FHL게임즈 사장은 게임산업 성장 가능성 하나를 바라보고 중남미 시장에 뛰어들었다. [사진 기업은행]

게임회사에서 10년. 잔뼈가 굵었다. 열심히 달려온 덕분에 서른 중반 젊은 나이에 네오위즈 임원으로 승진했다. 안정적 삶이 보장되려는 찰나 사표를 던졌다. 3개월 중남미 유람을 훌쩍 떠났다. 6년 전인 2009년 정철(40) FHL게임즈 사장은 삶의 방향을 갑자기 틀었다. ‘오춘기’를 맞은 직장인의 일탈이 아니라 인생을 건 도전이었다.

 “일을 하면서 국외 게임시장을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다가 중남미 시장에 대한 내용을 접했다. 인구도 많고 젊은층 비중도 높았다. 게임 같은 여가 콘텐츠를 즐기고자 하는 수요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게임산업은 낙후돼 있었다. ‘여기다’ 싶었다.”

 정 사장은 중남미 문외한이었다. 대학에선 행정학과 교육학을 전공했다. 중남미에 유학·연수는 고사하고 여행도 한 번 간 적이 없었다. 중남미에서 주로 쓰는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말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더 늦으면 안된다는 조급함이 들만큼 확신이 있었다”고 정 사장은 말했다.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에 지원 신청을 해 받아들여졌다. 현지 코트라 무역관 소속 직원이 안내와 통역을 도왔다. 둘이 함께 석 달 동안 중남미 19개국을 돌았다. “현장을 눈으로 직접 보니 확신이 더 들었다. 중남미는 막 떠오르는 신흥시장으로 잠재력이 어마어마했다. 인구 6억 명이 밀집해 있었고 스마트폰과 컴퓨터 보급률은 낮았지만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2009년 8월 FHL게임즈를 설립했다. 그해 12월 중남미를 타깃으로 한 게임포털 ‘카이보닷컴(www.kaybo.com)’을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 버전으로 열었다. ‘포인트블랭크’ ‘건즈’ ‘로한’ 같은 국산 게임을 소개했다. 정 사장의 판단은 맞아떨어졌다. 이용자 수는 해마다 200만 명씩 빠른 속도로 늘었다. 그런데 창업 3년째 한계를 맞았다. 투자 받은 60억원은 떨어져 가는데 수익이 좀처럼 나지 않았다. 결제 시스템이 문제였다. “중남미에서 은행계좌가 있는 사람은 경제활동인구의 50% 미만이었고 신용카드 보유 비중은 1%가 채 안됐다. 게임을 수익으로 연결시키려면 결제망이 필수인데 그곳에 구멍이 있었다.” 

 결제망에 투자를 집중했다. 은행계좌나 신용카드가 없는 사람도 쉽게 결제가 가능하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 지로 방식에서 복권 당첨금을 게임 포인트로 바꾸는 방법까지 80가지에 달하는 결제망을 구축했다. 요즘 유행하는 ‘핀테크(정보기술+금융)’에서 중남미에 특화한 남다른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중남미 시장에서 생존하려고 안간힘을 쓰다보니 자연히 갖추게 된 결과물”이라고 정 사장은 설명했다. 

 노력은 빛을 발했고 창업 4년차에 접어든 2013년부터 영업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현재 카이보닷컴은 14개국 중남미 회원 1000만 명이 가입한 포털로 자리 잡았다. 하루 방문자 수 60만 명에 이르고 매출의 95%를 해외에서 번다. 지난 17일 기업은행과 서울시 서울산업진흥원(SBA)이 진행하는 ‘서울 티로드(Seoul T-Road)’ 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투자도 받게 됐다.

 “월급쟁이 생활을 10년 했는데 창업 후 1년과 절대 바꿀 수 없다. 단맛과 쓴맛, 사람의 귀중함과 무서움. 진짜 인생을 배웠다”며 “직장인일 때 당연하게 누렸던 토요일과 일요일 휴식의 소중함도 알았다”고 했다. 정 사장은 “맞벌이 하는 부인이 아니었다면 못버텼을 것”이라고 웃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직원 월급은 다달이 챙겨줬지만 1년간 집에 돈을 가져가지 못하기도 했다. “2012년 말 월급 100만원을 1년 만에 집에 가져갔다. 처가살이를 했는데 그 돈으로 장모님, 가족과 외식을 했던 때 행복감은 잊지 못한다”고 정 사장은 얘기했다.

 “장사꾼은 젊어서 많은 돈을, 사업가는 나이 들어 많은 돈을 버는 걸 목표로 한다. 사실 처음 나도 장사꾼이었다. 빨리 돈을 많이 벌어 네오위즈 같은 회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사업을 해나가다보니 일종의 소명의식 같은 게 없으면 안 되는 영역이었다. 사업은 100을 벌면 50은 남에게 돌려줘야 성장이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정 사장은 창업을 꿈꾸는 이들에겐 “해외로 시야를 넓히라”고 조언한다. “국내 시장만을 목표로 하고 사업을 시작해선 절대 안 된다. 5000만 인구 한국은 세계 무대에 견주면 너무 좁다. 치열한 경쟁을 겪어본 한국 젊은이는 세계에서 기회를 찾고 적응하고 발전해나갈 잠재력이 크다.”

  조현숙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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