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상황 속 용기와 값진 희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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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남점보페리 사고 희생자 12명의 확실한 신원과 사고순간의 상황이 밝혀졌다.
8명의 대학생을 포함한 12명의 희생자는 선장의 하선명령에도「공포의 탈출」에 겁이나 움츠린 승객들의 앞장에 나서 먼저 건너 보임으로써 용기를 북돋우려던 자원선발대로 확인되고 있다.
엔진이 꺼지고 비상전기마저 나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화창엔 물이 차 오르고 선체는 옆으로 기운 채 세찬 바람과 사나운 파도에 흔들리는 카페리-.
승객들의 당황과 공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포세이돈·어드벤처』나『타워링』같은 극한상황을 소재로 한 영화의 한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3천t급의 강선이 바닥에 구멍이 뚫리지 않아 부력을 유지하는 한 화창의 침수만으로 침몰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것은 과학이다. 그러나 눈앞의 상황은 그 같은 과학의 믿음으로 불안과 당황을 가라앉히기는 너무 위태로 왔을 것임은 분명하다.
끝내 선장조차도 승객들을 옆의 구조선으로 옮기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 하선을 명령했다. 8명이 구명보트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배를 옮겨 타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산더미 같은 풍랑 앞에 구명보트의 곡예는 가랑잎의 불안, 그것이었다. 두 번째 구명보트가 내려졌으나 선뜻 나서는 승객이 없었다.
누구 젊은 사람들이 나서라는 선원의 독촉에 10명의 동아대학생을 포함한 14명의 젊은 승객들이 용감하게 나섰다. 구조선의 등불을 향해 필사의 접근을 시도하던 보트는 그러나 구조선에 부딪치며 전복, 12명이 파도에 쓸려 목숨을 잃었다.
위기상황에서 발휘되는 인간애는 언제나 감동적인 것이지만 동남점보페리호의 젊은 승객들의 애달픈 회생은 감회가 더하다.
사고가 난 19일 새벽은 24년 전 젊은 학생들이 뜨거운 피로 불의를 씻었던 4월 혁명의 날.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기라도 하듯 남해의 거친 파도 속에서 다시 젊은 혼들이 부서진 것이다. 그들의 의협의 희생은 2백여 승객은 물론 많은 시민들의 가슴속에 긴 메아리를 남긴다. 젊음은 역시 힘이며 희망일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사회와 역사는 젊음의 희생 없이는 안전항해의 작은 원칙조차도 지킬 수 없는 것일까. 아쉽고 안타깝다.
이번 사고도 예외 없이 여러 사람의 작은 잘못들이 쌓여 비극으로 번졌다. 누구도 전부의 책임은 질 수 없고 그러나 모든 관계 인이 나누어 책임을 져야할 그런 사고.
그 와중에서 아까운 12명의 목숨이 희생됐다면 살아남은 사람이 해야할 일은 자명하다. 의로운 젊음의 희생을 사회와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뼈에 새겨야 할 것이다. <박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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