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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평양까지(3)꿩대신 앍을 잡아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이런 머저리 같은 것들-.』
김정일은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노동당연락부 부부장 이정용을 닥달하고 있었다.
1977년7월30일.
하루전인 29일 3개월여의 극비공작 끝에 파리의 윤정희·백건우부부를 유고 자그레브까지 유인하는데 성공했으나 납치직전 눈치를 챈 백의 기민한 행동으로 납치에 실패하고 말았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윤정희를 놓치고>
75년 대남공작부서를 직접 관장한 뒤 김은 남한의 유명영화배우·연출가 납치를 역점사업의 하나로 추진해 왔다. 그 첫사업이 실패라니 화가 날 밖에.
『당강 허묵이를 불러 들이라구』분을 못참은 김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묵은 노동당연락부의 과장으로 윤정희납치를 위해 자그레브주재 북괴영사관 상무관으로 위장, 파견됐던 현지 공작책임자. 본명은 허무. 전 북괴최고인민회의의장 허헌의 아들이다.
며칠 후 송환된 허는 공작실패문책으로 연락부과장에서 벽지학교 교원으로 쫓겨갔다.
며칠후 두번째 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북괴돈 빌려줬다>
김은 그 자리서 노동당 공작담당부부장 강해룡(58)을 호출했다.
『남한의 최은희를 데려오시오. 남편 신상옥도 함께. 이번엔 실패하면 아오지 탄광이야』
윤정희의 납치에 실패한 직후인 77년8월중순.
강은 걷 공작을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홍콩을 거점으로 암약하고 있는 이상희가 현지 공작책으로 선정됐다.
이 여인이 살고 있는 마카오의 북괴무역관 금강공사를 통해 공작지령과 공작금이 건네졌다. 절대로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 합법적 방법으로 유인, 납북시키되 흔적을 남기지 말라. 납치는 공작선편으로 한다. 계속 연락을 유지하라.
이상희의 별명은 「도깨비」. 자유당말기 대한여자청년단 총무부장을 지내고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려다 63년 홍콩교포 유철민씨(73년작고) 초청으로 홍콩에 건너가 동거했다. 유씨가 죽은후 혼자 홍콩에 머무르며 어떻게 해서 무얼하며 사는지 누구도 그의 정체를 몰랐으나 실은 남편 유씨와 함께 오래전부터 북괴노동당연락부 해외혁명지도부의 레포(세포)였다.
이상희는 그 특유의 사교술로 여기저기 닦아 놓은 지면가운데 김규화를 점 찍었다. 그는 신상옥이 경영하는 신필림의 홍콩지사장. 최를 유인하는데는 안성마춤의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26년전인 58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김은 당시 주택영단 경리과에 근무했고 이는 이 회사 이사장 부인의 친구. 서로간에 안면이 있었다.

<해주로 진로돌려>
김은 그 뒤 영화계에 뛰어 들어 삼성필름이라는 영화수출입회사를 자영하기도 했으나 사업부진으로 회사를 정리하고 72년부터 대만으로 건너가 홍콩·싱가포르 등지를 오가며 영화 브로커노릇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70년 김이 홍콩에 들렸을 때 이민국에서 우연히 만나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가까워졌다.
그런 김은 신상옥이 같이 일하자고 권유, 73년부터 신필림 홍콩지사장 직책을 갖게 됐던것.
이 여인은 해외생활에서 늘 돈에 쪼들리는 김에게 돈을 빌려주고 외로움을 서로 달래는 깊은 관계에 빠져들었다.
77년9월초 이 여인은 김에게 넌지시 운을 뗐다.
최은희를 홍콩에 불러 영화를 만들자고 꾀었다. 작품은 한·홍콩합작 『양귀비』.
50대초반의 최은희가 양귀비로 분장한다는 것부터 걸맞지 않아 김이 이를 거절하자 이 여인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김에게 빌려준 달러(1만4천홍콩달러)가 광주에 있는 북한공작원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이를 빨리 안갚으면 서로간에 곤란한 문제가 생길 것 같다고 협박했다.
이 여인의 세번이나 거듭된 협박과 회유에 김은 지고 말았다. 평소 지면이 있는 금정영화공사사장 시조흠씨에게 부탁해서 영화 『양귀비』제작을 위해 초청한다는 초청장을 받아냈다.
다음해인 78년1월11일. 김이 얻어낸 초청장을 들고 최은희는 CPA기편으로 홍콩공항에 내렸다. 이틀 후인 13일하오. 북괴공작선 능라도호가 소리 없이 홍콩외항에 닻을 내렸다.
14일 하오5시. 이 여인은 최은희와 총적을 감췄다. 이틀 후인 16일새벽 최은희는 해주로 달리는 북괴공작선 능라도호선실에서 악몽을 달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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