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묻힌 "신필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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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안양영화예술학교>
최은희가 76년 남편 신상옥과 이혼한 뒤 생의 마지막 희망을 걸고 혼신의 힘을 쏟았던 곳은 안양영화예술학교.
최은희가 납치될 때 홍콩에서 온 브로커 왕동일이 던진 낚시밥도 이 학교 이전신축비용 제공이었으며 이 학교는 그녀의 꿈과 한이 서린곳이다.
최은희가 이사장으로 있을 때는 안양시우수동 268에 있었던 이 학교는 그 뒤 우신극장등의 경영주였던 연명흠씨(60)에게 넘어가 안양3동 산42의1에 교사를 신축, 안양예술고등학교로 변신했다.
납치사건 당시 교장이었던 강정희씨(60)는 지금도 교장직을 맡고 있다.
신상옥이 66년에 설립한 이 학교에서 최은희는 70년부터 교장을 맡다가 이혼후 『이 학교에서 손을 떼겠다』는 신의 약속에 따라 이사장직을 맡았었다.
그녀가 이 학교에 있는 동안 이 학교는 개천예술제에서 연속 대통령상을 받는등 일류예술학교로 부상했다.
신상옥은 이혼후에도 실제명의 변경은 해주지 않았고 결국 빚에 몰려 이 학교부지 1만3천여평이 77년에 정진건설에 아파트부지로 팔려 버렸다.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최은희는 77년말 안양교외에 새 부지를 계약하고 학교개설 허가까지 받아 놓았으나 자금이 없어 쩔쩔매던중 78년1월 홍콩으로부터의 유혹을 받았던 것이다.
최은희가 행방불명이 된 뒤 이 학교는 신상옥의 재산관리인인 형 신태선씨(63)에 의해 안양여상 이사장 유영렬씨(75)에게 넘겨졌다가 80년말 현재의 이사장 연씨에게 운영권이 넘어갔다.
이 학교는 당초 신상옥의「신필림」부설로 세워졌으며 당시 최대규모인 안양촬영소도 학교부지안에 있었으나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헐려 버렸다.
최은희의 납치로 이 학교는 79년도 신입생을 뽑치못할 정도로 진통을 겪었으나 이제는 정상을 되찾아 지금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배출한 졸업생들이 영화·TV등에서 활약하고 있다.

<신필림>
흥행보다 예술영화만을 추구했던 영화감독 신상옥의 정열이 결집된 신필림.
1946년에 영화계에 투신했던 신은 6·25의 와중에서 최은희을 만나 감독과 여배우로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50년대말 영화 『성춘향』으로 번 돈으로 차린 영화제작회사다.
59년에 서울영화소로 출발한 이 회사는 61년에 신필림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75년11월 사소한 잘못으로 허가가 취소될 때 까지 우리나라 영화게를 주릅잡았었다.
신필림이 만들어낸 대표적영화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연산군』 『빨간마후라』『벙어리 삼용이』『동심초』.
신상옥이 감독을 맡고 최은희가 주연한 작품이다.
이 커플은 이 영화들로 62년에 제정된 대종상을 휩쓸기 시작해 아시아영화제등 국제영화제의 상을 수 없이 타곤했다.
작품에 성공했던 신필림이었으나 경영에서는 계속 적자를 면치못해 신상옥은 줄곧 고전을 면치못했다.
70년부터는 신프로덕선으로 이름을 바꾸고 운영을 계속했으나 70년대부터는 더욱 자금난에 허덕였다. 신상옥과 최은희는 그동안 만들어 놓은 영화를 수출, 활로를 찾아 보고자 동남아·유럽·남미등을 순회하기도 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75년11월에는 검열에서 삭제됐던 두 장면을 영화에 삽입해 상영했다는 이유로 영화사 허가가 취소되는 비운을 맞았다.
신상옥은 빚에 몰리며 신필림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하다 최은희의 납치를 맞았고 6개월뒤 그도 못이룬 꿈을 안은채 납북된 것이다. <김 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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