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필의 시네·라마 사이언스] 빈부 격차처럼 풀리지 않는 난제, 힉스·우주상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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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의 한 장면 [사진 SBS]

‘풍문으로 들었소’라는 SBS 월화드라마가 요즘 장안의 화제다. JTBC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아내의 자격’ ‘밀회’를 함께 만든 안판석 감독과 정성주 작가의 후속작이다. 이 드라마는 서민층 딸이 한국 최고의 로펌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가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통해 한국 사회 특권층의 ‘갑질’을 풍자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단어로 통용되는 ‘갑질’ ‘갑을관계’의 바탕은 계층 간 부와 권력의 차이다. 자연현상에도 과학자들이 싫어하는 차이, 썩 아름답지 못한 ‘갑을관계’가 존재한다.

 2012년 유럽원자핵연구소(CERN)가 발견한 새로운 입자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 입자는 우리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들에 질량을 부여하는 메커니즘과 관련된 입자(힉스 입자)로 추정된다. 힉스 입자는 양자역학이 허용하는 불확정성의 범위 안에서 새로운 입자를 만들어 냈다가 다시 흡수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 결과 힉스 입자의 질량도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힉스 입자가 양자역학적으로 조정을 받는 정도는 CERN이 실제 관측한 값에 비해 1032이나 된다. 서른 자리가 넘는 임의의 숫자들을 더하고 빼서 한 자리 숫자를 정확하게 맞힌 셈이다.

 하지만 이건 뭔가 부자연스럽다. 하나의 이론 속에 너무나 큰 스케일의 차이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이처럼 큰 스케일의 미세조정이 우연히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뭔가 숨겨진 자연의 원리가 작동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아직 어떤 실험적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 과학자들은 이 문제를 ‘위계 문제(hierarchy problem)’라고 부른다.

 우주는 힉스 입자보다 더한 미세조정이 필요하다. 1998년 우리 우주가 점점 더 빠르게 거속팽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별들이 엄청난 중력으로 끌어당기는데 왜 우주의 팽창속도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빨라질까. 시공간 자체가 갖는 에너지 밀도(우주상수)가 그 원인으로 꼽힌다. 1917년 아인슈타인이 처음 도입한 우주상수는 우주 전체 에너지 밀도의 약 70%를 차지한다. 이 우주상수가 은하나 은하단 사이의 중력응축에 맞서 반(反)중력 효과를 내는 탓에 우주가 팽창을 거듭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우주상수의 값은 굉장히 작다. 1㎥의 부피 속에 양성자가 겨우 네 개 정도밖에 없는 수준이다. 이론적으로는 이보다 10124배는 돼야 자연스러운데도 말이다. 이것을 우주상수 문제라고 한다.

 ‘풍문으로 들었소’를 통해 상류사회를 엿볼 때마다 나 같은 서민은 엄청난 위화감을 느낀다. 그 느낌은 과학자들이 위계 문제, 우주상수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부와 권력이 계층 간에 심하게 차이 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위계 문제와 우주상수 문제가 현대 과학의 난제이듯, 계층 간 심한 부와 권력의 차이는 인류가 아직 풀지 못한, 그러나 언제고 꼭 풀어야 할 사회적 난제다.

이종필 고려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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