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31. 체육회관 개관 연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필자가 가장 애착을 갖고 있다는 건물인 서울 방이동 올림픽회관.

공직생활이나 각종 단체장 등으로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에게는 재직시 활동 등에 대한 일종의 향수가 있기 마련이다. 당시 했던 말과 행동이 어느 순간 오늘의 일처럼 되살아나 기억을 새롭게 하기 때문일까. 중요한 이벤트와 사건들을 회상할 기회를 갖게 된 요즘의 내가 그렇다. 나는 의미있는 것으로 기억되는 연설을 두어 차례 했었다. 1980년 국회 개원 연설과 66년 서울 무교동에 건립한 대한체육회관 개관 기념 연설이다.

79년 '10.26'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백두진 국회의장이 사퇴했다. 수석 부의장이었던 나는 국회의장 직무대리를 떠맡는다. 그리고 80년 '서울의 봄'이 왔다. 그러나 그 봄은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와 김대중씨의 체포로 이어지면서 혹한 속으로 빠져든다. 10대 국회의원 중 이후락.김종필씨 등이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 등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축출됐다. 이런 가운데 80년 9월 20일. 10대 국회의 마지막 본회의가 열렸다. 나는 국회의장 직무대리로서 국회 개원 연설을 하게 됐다.

"…저기 쓸쓸하게 비어 있는 많은 의석들을 바라보면서 이 자리에 서 있는 본인의 심경은 지난날에 대한 비감으로 어둡게 그늘져 있음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인이라는 같은 범주 속에서 저 빈 의원석의 주인공들과 본인 사이에 도덕적인 면에서나 윤리적인 차원에서 과연 얼마만큼의 크기와 무게의 차이가 있겠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나는 '성인은 고정된 마음이 없고 민심을 그 마음으로 삼는다'는 노자의 경구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민심의 동의 없이 정권을 찬탈하려는 신군부에 대한 나의 경고였다.

국회 연설은 정치인 민관식의 육성이다. 그러나 체육인으로서의 삶을 되돌아 보고 있는 요즘, 나는 체육회관 개관에 즈음한 연설에 더 큰 의미를 두게 된다. 그것은 세계 10위권 스포츠 강국 대한민국을 있게 한 거대한 밑그림의 시작이었던 역사적 이벤트가 배경이다. 체육회관 개관은 이후 태릉선수촌 건립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스포츠 인프라와 스포츠 행정 발전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게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개관 테이프를 끊은 이 날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귀빈 여러분. 왼편 벽을 주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는 베를린에서 거행된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골인하는 장면입니다. 그 옆에 걸린 사진은 장창선 선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보시는 바와 같이 빈칸으로 있습니다. 이 빈 벽이 금메달리스트의 모습으로 전부 채워지도록 모든 성원과 협조를 아끼지 말아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그것은 나의 제안이자 내 자신을 향한 다짐이기도 했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 스포츠의 근대화와 세계 수준의 경쟁력 확보를 통해 체육회장의 책무를 기필코 완수하겠다는 결의였다. 아직도 스포츠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조동표 대기자가 어느 출판물에서 나에게 '한국 스포츠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과분한 호칭을 부여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호칭이었지만 내 가슴은 뭉클한 감동으로 크게 떨렸다. 젊은 날의 다짐과 그 치열했던 의지가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

나의 사무실 벽에는 서울 오륜동에 있는 올림픽 회관 사진이 걸려 있다. 봄꽃 만발한 날의 사진이다. 이 자랑스러운 한국 스포츠의 보금자리는 39년 전 무교동에서 첫 테이프를 끊은 체육회관을 모태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이제 필자는 체육회관 건립과 태릉 선수촌 건설에 이르는 격동의 시간을 되돌아 보려 한다. 결연한 의지와 영감, 천우신조가 어우러져 스포츠 한국의 기적을 태동케 한 내 젊은 날의 눈물겨운 기록들이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