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 브랜드 개성 없다고? 고객이 스타일 만들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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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새로 장만한 옷을 입고 산뜻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가 똑같은 패션을 거리에서 마주친다면-.

‘H&M’을 이끄는
칼요한 페르손(Karl-Johan Persson)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개성을 중시하는 사람에겐 정말 피하고 싶은 순간일 것이다. 의류 생산자가 기획·생산·유통·판매까지 직접 챙기는 ‘SPA’ 브랜드가 늘면서 이런 상황을 피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SPA 브랜드 활성화는 ‘전세계 70억 명이 평등하게 패션을 즐기도록 해 준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전세계 55개국 3500여 개 매장에서 옷을 파는 최고경영자는 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스웨덴 태생의 국제 패션 브랜드 ‘H&M’을 이끄는 칼요한 페르손(Karl-Johan Persson·40·사진)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봤다.

“H&M은 모두에게 매력적이면서 민주적인 브랜드다. 패션·품질을 갖춘 데다 가격이 좋기 때문에 많은 소비자가 만족하며 구매하는 것이다.”

페르손 CEO는 탄탄한 경영실적을 발표한 직후여서인지 더욱 자신만만해 보였다. H&M은 지난 1월말 2014년 경영 실적을 발표했다. 매출액은 전년대비 18%가 늘어난 1766억 스웨덴크로나(SEK), 우리 돈 22조3600억원에 달했다. 지난 한 해에만 349개의 매장을 새로 열었다. 합리적인 가격에 다양한 스타일을 빠르게 공급하는 시스템으로 무서운 성장세를 구가하면서 ‘패션 민주화’를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키고 있는 셈이다. 페르손 CEO의 할아버지 얼링이 1947년 세운 H&M은 현재 그의 아버지 스테판이 회장을 맡고 있으며 페르손은 2009년부터 회사를 이끌고 있다. 지난 2010년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개성 표현이다. ‘패션 민주화’의 부작용이라면 몰개성일 것이다.

지난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H&M 스튜디오’ 라인의 올 가을·겨울 패션쇼. 미래를 컨셉트로 스포츠 분위기를 강조한 의상을 내놨다.

“한편으론 사실이다. H&M의 목표도 고객이 우리 옷으로 개성을 표현케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제공하는 것은 다양성이다. 다른 브랜드도 여러 가지 스타일을 고객에게 선보인다. 우리가 고객에게 (H&M 스타일이 정답이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여기 H&M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개성 있는 스타일을 체험할 수 있으니 찾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뿐이다.”

동북아 3국, 한국·중국·일본만 해도 나라별 소비자 특성이 다르다.

스톡홀름 디자인 센터 한 곳에서 국가마다 다른 특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양한 상품을 준비할 수 있나.

“디자인을 스웨덴에서 하지만 나라마다 어떤 상품을 소개할지는 각 나라의 의견을 중시하고 있다. 또 같은 상품이라 해도 해당 국가의 소비자가 어떻게 하면 더 잘 받아들일지, 어떻게 홍보해야 좋을지는 각 나라 담당자에게 일정 부분 자율권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해 온) 경영 성과를 보면 이런 전략이 제대로 작동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을 지역별로 특화하고, 어떤 부분을 본사 차원에서 결정할 것인지 균형을 잘 잡는 것이 핵심 과제다.”

H&M은 스톡홀름 본사에 200명 남짓한 인력으로 디자인팀을 운영하고 있다. 색채·소재·무늬·형태 등 디자인 영역별로 유행을 분석하고 그에 맞는 제품을 기획하는 일이 디자인팀의 몫이다. 대개 1년 6개월 전에 기획을 마치지만 일부 유행상품은 3주 만에 새 상품 기획을 끝내기도 한다.

SPA 패션 브랜드의 상품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보니 ‘한 번 입고 버리는 옷’이란 인식이 있다.

때문에 환경 오염의 주범이란 주장도 단골로 제기된다. 그러다 보니 H&M 같은 회사는 환경 보호를 경영 원칙으로 삼고 이를 적극 홍보하기도 한다. 한데 이것을 두고 시늉만 하는 것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다.

“(환경을 생각한 생산 등 지속 가능 경영은) H&M이란 브랜드를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품질·패션·가격이란 3대 요소에 지속가능성을 추가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이를 소홀히 하면서 당장의 이익만 좇는다면 지속가능성에 관심 갖는 소비자가 많아질수록, 고객이 H&M이라는 브랜드를 낮게 평가하게 될 것이다. (가격 측면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면서 지속 가능하도록 경영하는 것 역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거대 패션 기업 CEO이자 알려진 재산이 약 6000억원(2008년 기준)인 북유럽 미남 경영인의 패션 스타일은 어떨까. 연간 실적 발표를 마친 직후였지만 그는 단정한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매지 않은 차림이었다. 프랑스·이탈리아 패션 기업 경영인들처럼 세련된 슈트에 행커치프 등을 더해 한껏 꾸민 모양새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는 오히려 “(오늘 같은 슈트 차림은) 조금 보수적인 것 같다”고 했다.

평소엔 H&M 말고 명품으로 치장하는 것 아닌가.

“‘명품은 절대 입지 않고 H&M만 입는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주로 우리 회사 브랜드 옷을 즐겨 입는다. 패션을 좋아해서 다양한 브랜드 매장에 들어가 입어보고 때에 따라 다양한 상품을 사는 걸 좋아한다.”

페르손 CEO는 “슈트보다 캐주얼을 선호한다”며 “평소엔 청바지 데님 종류 하의에다 스웨터를 잘 입는다. 사무실에선 간편한 운동화 ‘스니커즈’와 셔츠+스웨터로 멋을 내곤 한다”고 말했다.

파리 컬렉션서 화제 된 ‘ H&M 패션쇼’
WSJ “입기에 좋고 매력적, 가격까지 훌륭”

프랑스 파리는 ‘세계 패션의 수도’라 불린다. 파리에서 태어난 이름 높은 명품 브랜드, 패션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 걸출한 패션 디자이너들, ‘메이드 인 프랑스’라는 매혹적인 이미지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패션 수도’라는 명성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매년 봄·가을 파리에서 벌어지는 기성복, 즉 ‘프레타 포르테’ 패션쇼다. 흔히 ‘파리 컬렉션’이라 불린다. 프랑스 태생의 브랜드·디자이너는 물론 한국·일본 등 아시아 국가의 디자이너들도 파리로 건너가 패션쇼를 열고 있다. 파리라는 강력한 패션 이미지와 함께하고 싶어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파리 컬렉션에 제대로 이름을 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일반적으로 파리 컬렉션 스케줄은 파리의상조합(Chambre Syndicale de la couture)이 관리한다. 파리 컬렉션에 참여를 원하는 회원 혹은 비회원 브랜드·디자이너 간의 스케줄 조정이 조합의 역할이다. ‘온(on) 캘린더’라 불리는 컬렉션 시간표가 그것이다. 하지만 ‘오프(off) 캘린더’라 불리는 패션쇼도 있다. 지난 3월 파리 컬렉션에서 유명 스타와 슈퍼 모델들이 대거 참석해 화제가 된 H&M 패션쇼가 그 예다. 일종의 장외 또는 번외 경기처럼 보이지만 이 패션쇼도 파리의상조합의 양해 아래 이뤄지기 때문에 아무나 이름을 올릴 수 없다.

H&M은 지난 2013년부터 파리 컬렉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엔 지난 3월 4일 오후 9시(현지시간), 파리의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 올 가을·겨울용 패션쇼를 열었다. 여기는 H&M보다 1주일 뒤 브랜드 ‘샤넬’이 패션쇼를 연 파리의 대표적인 문화 공간이다. 패션 잡지 인스타일 영국판은 H&M 패션쇼가 “파리 컬렉션 첫날의 주요 스케줄”이라고 썼다. 오프 캘린더 쇼지만 내로라하는 다른 명품 패션 브랜드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고 있다는 방증이다.

우주 공간을 주제로 삼아 연출된 패션쇼는 ‘H&M 스튜디오’ 라인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무대에는 켄달 제너(Kendall Janner), 지지 하디드(Gigi Hadid), 에디 캠벨(Edie Campbell) 등 슈퍼 모델들이 대거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이 밖에도 유명 가수 솔란지 놀스(Sola ge Knowles)와 배우 누미 라파스(Noomi Rapace), 오드리 토투(Audrey Tautou), 한국 연기자 김나영과 모델 김아이린이 맨 앞줄에 앉아 패션쇼를 지켜 봤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H&M이 파리 컬렉션에 당당히 입성한 배경에 대해 “(거대 기업이라 해서)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고 설명했다. WSJ은 패션쇼에 선보인 의상들이 “입기에 좋아보였을 뿐 아니라 정말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가격까지 훌륭하다”고 평했다. 강승민 기자

스톡홀름(스웨덴)=강승민 기자 quoiqu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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