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희 기자의 ‘우사세’] 요우커를 만났을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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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퇴근시간이 한참 지난 후라 지하철이 텅텅 비었을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더군요. 출퇴근 때 지옥철만은 못해도 앉을 자리는 없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은 한산한 곳에 자리를 잡고 섰습니다. ‘30분 정도 서서 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요.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하던 지하철이 왁자지껄해 졌습니다.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외국인 관광객 가족이 서 있더군요. 양손 가득 든 쇼핑백이 그들이 명동에서 쇼핑을 마친 후 을지로입구역에서 지하철을 탔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남자 한 명에 여자 두 명, 미취학 아동으로 보이는 아이들 5명으로 이뤄진 대가족이었습니다. 여자 둘의 관계가 친구인지 자매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중국인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시선은 오랫동안 남자에게 머물렀습니다. 그 남자가 장동건처럼 잘 생겨서가 아니라 서너 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 아이를 안고 있는 게 버거워 보여서입니다. 오랜 여행에 지친 아이는 곤히 잠들어 깰 생각은 안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힘들게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을 최근에 본 기억이 없어서입니다.

평소 지하철을 타고 다닐 때도 아이를 안거나 엎은 부모들을 자주 마주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어지는 풍경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0.1초의 고민도 없이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걸 보면서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낀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이번 승객들은 왠지 냉정하더군요. 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문득 몇 해 전 다녀온 대만여행이 떠올랐습니다. 3박4일 동안의 대만 여행 중 기억에 남는 관광지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게 있습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호텔 위치를 찾지 못해 헤매던 저를 숙소까지 안전하게 안내해 준 건 인근의 다른 호텔 직원이었습니다. 걸어서 5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지만 그때의 경험은 대만을 또 방문하고 싶은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만 지하철에서는 음식물 섭취가 금지돼 있다는 걸 모른 채 음료수를 들고 개찰구를 통과해 지하철을 기다리던 저에게 사람들은 하나같이 얘기했습니다. “음료를 가지고 들어오면 안 된다. 벌금을 낼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한두 명이 그랬으면 원래 시민의식이 투철한 사람이겠거니 할 텐데 제가 마주친 사람들이 전부 그러니 국민성이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더군요. 그때 저도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에게 친절하게 대하겠다고요.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늘 괴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요우커(遊客, 중국인 관광객)에 대한 인식은 좋지만은 않습니다. 명동을 향한 발걸음이 점점 줄어든 데 그들이 한 몫 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때가 왔습니다. 2018년에는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요우커 숫자가 1000만 명이 넘을 거라는 추측이 나오니 말입니다. 2018년에는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 다섯 명 중 하나가 중국인이라는 거죠.

한국을 찾는 중국인들이 늘어나는 이 상황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저부터 앞으로는 요우커가 지나갈 때 반가운 미소를 지어보이려고 합니다. 대만 사람들이 저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처럼 중국인들에게 한국이 또 오고 싶은 나라로 기억될 수 있게 말입니다.

강남통신 전민희 기자 skymini171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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