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딸 간식비 13만원 때문에 130kg 소주 상자 훔친 가장

중앙일보

입력

 “와, 팀장님 이거 보세요. 정말 힘이 장사네요. 이 무거운걸….”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도봉경찰서 강력 5팀 사무실. 김정인 경사가 옆에 있던 문준석 팀장을 급하게 불렀다. 김 경사는 이날 서울 창동의 한 치킨집 사장으로부터 가게 옆에 쌓아둔 소주상자가 사라졌다는 신고를 받고 인근 폐쇄회로(CC)TV를 확보해 돌려보던 중이었다. 키는 172㎝정도나 됐을까, 마른 체격의 한 30대 남성이 130kg에 육박하는 소주 네 상자를 순식간에 짊어지고 사라지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됐다. CCTV속 용의자는 소주 네 상자를 등에 지고 순식간에 범행 장소 뒤편인 상가 주차장으로 향했고, 흰색차량에 이 상자를 실은 뒤 순식간에 사라졌다. 용의자가 소주상자를 차량에 옮기고 주차장을 빠져나가기까지는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용의자의 모습은 잡혔지만 CCTV 화질이 좋지 않아 번호판의 식별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김 경사와 강력 5팀은 차량이 찍힌 CCTV 화면을 갖고 용의자의 동선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김 경사는 용의 차량이 향한 서울 신창동쪽의 방범용 CCTV는 물론 버스 블랙박스와 사설CCTV 등 50여대가 넘는 CCTV를 열흘 넘게 분석했다. 그 결과 전체는 아니지만 일부 번호판의 숫자가 식별가능한 영상이 확인됐고, 김 경사는 이를 근거로 색깔과 차종이 같은 차량 145대를 뽑아냈다. 이후 등록 기준지를 서울로 한정 지어 용의차량을 다시 17대로 좁힌 뒤 일일이 탐문수색을 벌여 용의자를 발생 약 보름만인 지난 1일 붙잡았다.

그렇게 경찰에 붙잡힌 CCTV 속 남성은 지극히 평범한 주류 배달원 박모(37)씨. 그는 CCTV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자 순순히 범행을 인정했다고 한다. 경찰조사 결과 박씨는 8세ㆍ4세의 두 딸을 둔 평범한 네 식구의 가장이었다. 그는 11년째 주류배달 일을 해왔다고 했다. 매일 오전 6시면 집을 나서 12시간 이상 하루 평균 100개의 상자를 나르는 고된 일이었다. 그래도 월 220만원 정도는 벌어 그럭저럭 네 식구가 먹고 살 수는 있었다. 하지만 3년전쯤 부터 주류를 납품해 판매하는 소매업체들간의 경쟁이 거세졌고, 박씨가 배달 물건을 받아오는 소매점의 매출도 줄었다. 자연스레 박씨의 월급도 30만원 가량이 줄어들어 월 190만원 수준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 돈으로는 생활비 등을 제하고 나면 두 딸의 학원비는커녕, 간식을 사주기도 버거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박씨의 눈에 소주 상자가 눈에 띄었고, 우발적으로 소주 상자를 갖고 도망갔다는 게 박씨와 경찰의 설명이다.

박씨는 경찰조사에서 “훔친 소주 네 상자를 수유리에 있는 납품업체에 갖다가 팔아 13만원을 받았다”면서 “이 돈으로 두 딸들에게 맛있는거라도 사주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박씨를 절도 혐의로 불구속 입건해 조만간 검찰에 송치할 계획이다. 김 경사는 “조사 내내 박 씨에게서 깊이 반성하는 태도가 느껴졌다”며 “11년간 범죄 한 번 하지 않고 성실히 살아오던 그가 가장으로서의 부담감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가 모두 끝난 뒤 박씨는 김 경사에게 문자 한 통을 남겼다고 한다. ‘속상해서 술 한 잔 했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죄값을 치르고 다시 열심히 살겠습니다.’

김민관 기자 kim.mink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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