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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강대국에 끼었다고 큰일났네 할 필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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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윤병세 외교부 장관(가운데)이 31일 청와대 국무회의에 참석했다. 윤 장관은 지난달 30일 열린 재외공관장회의에서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와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문제로 인한 외교 난맥상에 대해 “딜레마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말해 논란을 불렀다. 오른쪽은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박종근 기자]

“올해 외교 환경이 녹록지 않다. 한국 외교와 외교부도 굉장히 많은 도전에 직면해 과거 어느 때보다 역량과 지혜가 요구되고 있다.”(지난달 28일 오후 2014 영산외교인상 시상식에서)

 “미·중 사이에서 러브콜을 받는 것은 딜레마가 아니라 축복이다. 패배주의적, 자기비하적, 사대주의적 시각에서 우리 역량을 외면하는 데 대해선 당당하게 설명해달라.”(지난달 30일 재외공관장회의에서)

 이틀 간격을 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발언이다. 앞의 것은 위기를 강조한 반면, 뒤의 것은 자신감을 강조했다. 같은 듯 다른 뉘앙스다. 이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윤 장관의 재외공관장회의 작심 발언을 놓고 외교가에서 논쟁이 뜨겁다. 현실을 외면한 아전인수식 발언이라는 비판에서부터 할 말을 했다는 옹호론도 있다. 관심은 윤 장관이 이 시기에 왜 그런 발언을 했느냐다.

 외교부 내에선 무차별적으로 날아드는 책임론에 대한 정면 돌파용이라고 설명한다. 한 당국자는 “그동안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참여 등의 이슈에서 외교부가 여론의 뭇매를 맞자 장관이 정면 돌파를 선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윤 장관은 미·중 사이에 낀 무능한 ‘새우 외교’란 비판에 반박하는 것을 핵심으로 잡고 개회사를 직접 손봤다고 한다. 외교부 내 북미라인에선 그동안 “우리의 위상이 미·중·일 사이에 껴서 아무것도 못한다고 자학할 정도는 아니지 않느냐”며 억울해하는 분위기가 있어 왔다.

 연설 대상이 외교 일선에서 뛰는 재외공관장들이라는 점도 작심 발언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번 회의는 10년 만의 통합 공관장회의로, 대사와 총영사 176명이 모인 역대 최대 규모였다.

 윤 장관의 발언이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의 국장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을 수행한 직후 나왔다는 점에서 청와대와의 교감 여부도 관심을 끌고 있다. 청와대 외교안보 분야 핵심 인사는 “청와대와 사전 교감을 한 발언은 아니다”며 “외교 주무장관으로서 현안에 대해 집안 행사(공관장회의)에서 한 발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문제는 윤 장관의 발언이 국민이 느끼는 문제의식과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을 자초했다는 점이다. 이화여대 박인휘(국제관계학) 교수는 “사드와 AIIB 논쟁에서 논의 자체에 발을 담그지 않으려는 소극적 모습을 보이고선 이제 와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청와대는 일단 발언의 파장이 커지는 걸 경계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31일 청와대 특보단 회의에서 사드와 AIIB를 둘러싼 외교 정책에 대해 “언론이나 이런 데서 우리가 강대국 사이에 끼었다고 ‘아이쿠 큰일 났네’ 하는데 너무 그럴 필요는 없다”며 “우리는 의연하게 여러 정보를 갖고 종합 판단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신뢰가 중요한 만큼 우리 시대의 외교도, 경제도 원칙과 일관성을 갖고 해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윤 장관의 발언을 끌어안고 가는 모양새다. 또 다른 청와대 인사는 “윤 장관의 발언이 좀 너무 나간 측면은 있다”면서도 “중요한 건 우리 외교가 주눅 들 필요는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글=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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