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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한 청춘 할머니 운전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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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운전을 남편한테 배웠다. 1979년 미국 유학 시절. 운전 배우다 이혼한 부부 많다더니 불과 한 달 전 면허 딴 주제에 학생인 나를 인격적으로 마구 모욕해 길거리 실기수업 중에 운전대를 놓고 그만 나와버렸다. 운전학원을 알아보니 세 번 실습에 160달러. 그 당시 학교 아파트 월세 값이다. 아깝다. 그 돈도 벌 겸 새 마음으로 선생같이, 학생같이 다시 시작했다. “야, 너 뇌가 없냐? 갑자기 브레이크를 그렇게 밟으면 어떻게 해”하던 남편이 “브레이크를 그렇게 밟으면 위험합니다”로 바뀌었고, “한 달 전 딴 주제에 자긴 안 그랬냐?”하던 내 대답도 “네, 조심하겠습니다”로 변했다. 돈이 좋긴 참 좋더라. 돈 번다는 상상만으로도 둘 다 이렇게 공손해지니.

 선생이 초짜라서 그런가. 결국 여덟 번 시험을 치른 끝에 면허증을 손에 쥐었다. 그 후 10여 년 동안 차 없으면 껌 한 통도 살 수 없는 외국에서 운전 덕분에 잘 살다가 서울로 완전 귀국했다. 그 뒤로 지금까지 한시도 운전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셋집에서 자가용이 웬 말? 그게 바로 나다. 전세나 내 집이나 누우면 다 내 공간이 되지만 차는 없으면 장롱에 발이 묶인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지난 10년간 노인 운전자 사고가 4배 넘게 늘었다는 기사를 봤다. 5년 뒤엔 나도 노인 운전자다. 그때도 가로수를 누비며 달릴 것만 같은데 통계가 그렇다니. 사고를 낸 70대 운전자들의 고백도 충격이다. ‘갑자기 시야가 뿌옇게 안 보여서, 발이 갑자기 움직이질 않아서’다. 나이 들면 순발력도 유연성도 떨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

 5년만 지나면 베이비붐 베이비들이 다들 팔팔한 청춘 할머니·할아버지가 된다. 그들은 결코 운전을 포기하진 않을 거다.

 차는 끌고 다니는 폭탄. 몸이 말을 안 들어서 행여 잘못 들이받으면 수십 명 살인도 가능하다. 면허 갱신할 때마다 검사랑 체크랑 꼼꼼히 하는 건 기본이고.

 초보 운전자처럼 ‘차 뒤에 경고문 부착하기’를 의무화하면 어떨까. ‘어르신 운전 중’ 이런 칙칙한 말 말고 남들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그래서 붙이고 다녀도 운전자의 체면을 전혀 구기지 않는 그런 문구 말이다.

 ‘88한 할머니 운전 중. 조심 부탁해요, 젊은이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잘 안 따라주는 할아버지 운전 중’. 뭐 이런 건 어떨까.

 법을 통해 강제로 붙이게 하든지, 붙인 자에겐 차 보험료를 깎아주든지. 그러면 노인 운전 사고가 엄청 줄지 않을까 싶다.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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