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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지방 이주 직원 23%뿐 … 2만 명 중 1만5000명이 '혁신 기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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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 광주전남혁신도시로 이전한 한국전력공사 직원 A씨(38·여)도 엄마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딸의 초등학교 입학식은 당일 휴가를 내 챙겼지만 3월 초에 연달아 찾아온 학부모 총회와 신학기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울 잠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친정엄마가 매일 찾아와 딸의 식사와 등·하교를 챙기지만 마음이 무겁긴 마찬가지다. A씨는 “한창 엄마 손이 가야 할 시기인데 엄마가 못 챙겨 아이가 왕따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라며 “휴직이든 퇴사든 대책을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2012년부터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정부 정책이 시행되면서 ‘신(新)이산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일자리와 편의시설의 수도권 집중을 해소하고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방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목표로 시작된 정책이 새로운 사회문제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24일 공공기관 지방이전추진단과 김희국 새누리당 의원실에 따르면 2012년 12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2년간 67개 공공기관의 직원 2만219명이 부산·대구·광주전남·울산·강원·충북·전북·경남·제주 10개의 지방 혁신도시로 이사를 했다. 이를 포함해 2016년까지 154개 공공기관 소속 4만7000명(올해 1월 기준)이 지방 혁신도시에 둥지를 틀 예정이다.

하지만 애초에 계획했던 ‘지역 균형발전’은 요원한 가운데 가족과 뿔뿔이 흩어져 사는 ‘혁신 기러기’만 늘어나는 추세다. 가족이 함께 이주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대신, 가족을 서울에 두고 이주하는 ‘나 홀로 이주’가 대부분이라서다. 지방이전추진단 조사 결과 지방으로 이전한 기관에 근무하는 2만219명 중 가족과 함께 이주한 인원은 전체의 23.1%인 4666명에 불과했다. 미혼자(5052명)를 포함해 1만5000여 명이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살기를 택한 것이다. 그나마 부산(28.5%)이나 대구(28.1%), 전북(27.3%)은 가족 동반 이주율이 높지만 강원(11.5%)·경북(18.1%)은 10명 중 1~2명만 가족과 함께 이전했다.

 특히 광주전남혁신도시 이전 기관 중 대규모 이주로 기대를 모았던 한국전력공사는 1531명 중 268명(17.5%)만 가족동반 이주를 했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혁신 기러기는 832명, 미혼·독신자가 431명이었다. 울산혁신도시로 이주한 근로복지공단은 432명 중 40명(9.3%)이, 경북혁신도시에 정착한 교통안전공단은 332명 중 30명(9%)만 가족을 데리고 이사했다. 902명 중 212명(23.5%)만 가족과 이주한 한국도로공사, 312명 중 50명(16.6%)이 동반 이주한 중소기업진흥공단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지방이전추진단 측은 “2014년 8월 이후 신규 이전한 기관들이 전체의 62%라 사실상 지금은 이전 초기단계”라며 “시간이 지나면 가족동반 이주율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정적 전망이 더 많다. 맞벌이 부부 비율을 간과한 게 문제다. 인프라 부족은 둘째치고 현실적으로 이주가 어려운 배우자가 많다는 얘기다. 울산혁신도시로 이전한 한국석유공사 직원 정모(45)씨는 “부인이 15년간 다녀온 직장을 내가 발령났다고 그만두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주택대출이나 아이들 학자금을 계산해봐도 외벌이로 버티라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사내커플인 김모(35)씨 부부는 회사가 경북 김천으로 이전하면서 이산가족이 됐다. 남편은 서울에서 김천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김씨는 서울 지사에 발령받았다. 육아휴직을 막 끝낸 김씨는 “친정엄마 용돈과 육아도우미 고용비용으로 월급이 거의 다 들어가는 상황에서 아이가 크게 아프기라도 하면 더는 못 버틸 것 같다”며 “이산가족을 만들자는 정책 아니고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혁신 기러기’들에겐 교통비나 생활비 부담도 크다. 김씨는 “남편은 금요일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오고 일요일 저녁이면 떠나는데 하루 얼굴을 보기 위해 매주 10만원씩 교통비(주유비)를 지출한다”며 “수입은 그대로인데 월 교통비 지출만 40만~50만원 늘었다”고 푸념했다.

 나 홀로 이주자들이 넘치는 반쪽짜리 혁신도시에 가족단위 이주자들을 유인하려면 현실적 지원책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희국 새누리당 의원은 “혁신도시는 공공기관의 주소지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이전 기관을 중심으로 새로운 생활거점을 조성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무엇보다도 사람이 터를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방이전추진단 측은 “이전기관 임직원 배우자의 직장을 파악해 공무원이나 교사, 공공기관 종사자인 경우 근무지를 가까이 배치하거나 교사의 경우 지역이전이 쉽도록 지원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라며 “교육시설, 병원, 편의시설 등 인프라 부족으로 이주를 꺼리는 가족들에 대한 유인책도 계속해서 찾고 있다”고 말했다.

[S BOX] 미혼 직원 "소개팅도 연애도 포기"

공기업 지방 이전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건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혁신 기러기’뿐만이 아니다. 미혼 직원도 역시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홀로 살게 됐기 때문이다. 회사와 함께 지방으로 이전한 미혼 직원들은 얼마나 될까. 공공기관 지방이전추진단 조사에 따르면 지난 1월 현재 지방에 이전한 2만219명 중 미혼·독신 직원은 5052명. 광주전남혁신도시가 1654명으로 가장 많고 대구(725명)·전북(630명) 순이다.

 광주전남혁신도시로 이전한 이모(29)씨는 “주말마다 서울 집에 올라가는 게 유일한 낙”이라며 “소개팅도, 연애도 포기한 지 오래”라고 말했다. 이씨는 “매일 퇴근하면 게임을 하거나 밀린 TV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보는 게 고작”이라며 “밥도 회사에서 먹고 사람도 안 만나는데 내가 지역경제 개발에 도움이 되고 있는 거냐”고 말했다.

 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미혼 직원의 정착률을 높이기 위해 만남 행사를 주선하고 있다. 지난달 9일 한국농어촌공사는 광주광역시 라마다호텔에서 ‘청춘콘서트’ 행사를 열었다. 인근 5개 기관 미혼 직원 40명이 행사에 참여했다. 진주시가 지난해 10월 공공기관 임직원과 공무원, 금융기관 직원 등을 대상으로 연 단체 미팅에는 남녀 60명이 참석했다.

채윤경 기자 pch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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