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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식의 야구노트] 박한이가 헬멧 덜 만지면 야구 경기시간 빨라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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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박한이

지난 17일 울산야구장. 삼성 박한이(36)가 타석에 들어서자 관중석의 한 팬이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야, 임마! 헬멧 벗고, 장갑 벗고, 방망이로 선 긋고 뭐 그리 바쁘노? 그거 하느라 날 새겠데이.”

 지난해 말 한국야구위원회(KBO)는 프로야구 경기시간(2014년 평균 3시간27분)을 줄이기 위해 새 스피드업 규정을 만들었다. 2015년 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에 박한이가 ‘표적’이 됐다.

 스피드업 규정은 박한이를 겨냥한 것일까. 박한이가 경기시간을 엿가락처럼 늘어지게 하는 주범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2001년 데뷔한 그는 2003년부터 루틴(습관)을 보이기 시작했다. 타석에 들어서기 전 장갑을 고쳐 끼고, 헬멧을 벗었다가 다시 쓰고, 방망이로 홈플레이트 근처에 선을 긋고, 스윙을 두 번 한다. 투수가 공 하나를 던지고 나면 박한이는 루틴을 처음부터 반복했다. 일종의 의식 같았다. 박한이가 타석에서 허비하는 시간은 최대 24초였다.

 지난 22일 대구구장. 한화와의 시범경기에 나선 박한이의 루틴을 살펴봤다. 배트로 선을 긋고, 허공에 두 번 스윙하는 것으로 끝냈다. 소요시간은 8~10초. 박한이는 “스피드업에 동참하기 위해 동작을 줄였다. 사실 힘들고 어색하다. 시즌 중 슬럼프에 빠지면 옛 루틴을 다시 할까봐 고민”이라고 토로했다. 사실 박한이의 동작은 강화된 스피드업 규정과 관계 없다. 모든 동작이 타석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나온 KBO 스피드업 규정은 ‘타자의 두 발이 타석에서 벗어나면 스트라이크를 준다’고 명시했다. 지난 16일엔 ‘스트라이크 대신 벌금 20만원을 부과한다’고 완화했다.

 경기시간을 줄이는 건 선수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조성환 해설위원은 “박한이가 억울한 측면이 있다. 실제로 KIA 신종길의 예비동작이 더 길다”고 말했다. 송진우 해설위원은 “내가 투수일 때 박한이를 많이 상대했지만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벤치에서 매번 사인을 내는 관행이 경기시간을 길게 한다”고 지적했다. 야구인 모두가 야구의 빠른 진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야구장은 스피드업 때문에 말 많고 탈 많다. 무심결에 발을 뺐다가 스트라이크를 먹는 경우가 생겨나자 타자와 감독, 심지어 야구팬도 과도한 규제라고 비판했다. “차라리 메이저리그처럼 벌금(최대 500달러·약 57만원)을 물려라”고 하더니, 스트라이크 대신 벌금을 부과하자 불만의 목소리가 또 높다.

 야구장 밖의 소리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3시간 이상의 경기는 방송국이 중계를 꺼린다. 젊은 팬 형성도 어렵다. 2012년 런던 올림픽부터 야구가 정식종목에서 빠진 이유 중 하나가 긴 경기시간이다. 미국과 일본야구가 내부의 불만과 싸우며 스피드업을 강화하는 이유다.

 야구는 룰 개정을 가장 꺼리는 스포츠다. 그렇다고 야구가 영원불변했던 건 아니다. 1800년대 초반 삼진의 개념이 없었을 때 타자는 페어 지역에 타구를 날릴 때까지 계속 타격했다. 못 치는 타자는 수십 번 스윙했고, 경기시간이 늘어지자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분해 삼진이라는 룰을 만들었다. 아마도 이게 최초의 스피드업 규정이었을 거다.

 불필요한 시간을 줄인다면 야구의 본질이나 전통을 흔들지 않아도(이스라엘 리그처럼 7이닝으로 줄이지 않더라도) 스피드업이 가능하다. LTE를 넘어 5G(5세대)로 가는 시대에 야구도 생존법을 찾아야 한다. 당장 불편하고 억울하더라도 스피드업은 꼭 필요하다. 박한이도 한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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