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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야 할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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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괴팍한 천재의 일대기쯤으로 생각했는데 보고 난 후 잔향이 오래 남는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이야기다. 미안함 혹은 죄책감이라고나 할까. 제2차 세계대전의 끝을 앞당겨서 수많은 인명을 구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하는 컴퓨터가 앨런 튜링의 발명품인 셈인데. 훈장을 받았어도 부족했을 그에게 영웅 대접은 고사하고 동성애가 범죄라며 화학적 거세를 강제했다니. 편견에 사로잡힌 국가와 사회가 그를 자살로 몰아간 것 아닌가. 그가 느꼈을 모멸감과 비애를 떨쳐버리기 힘들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는 그 역사가 길다. 구약성경에서는 남색을 소돔과 고모라가 타락한 대표적인 모습으로 묘사한다. 신약성경에서도 바울은 동성애가 순리가 아니므로 이러한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동성애를 부정하는 기독교적 전통은 급기야 종교재판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기에 이른다. 튜링을 거세한 나라가 영국이라는 것이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어디 기독교뿐일까. 다른 많은 종교와 사회에서도 동성애는 근절되어야 할 범죄이자 박멸해야 할 질병이었다.

 음악계에서의 동성애 역시 비정한 사연이 적지 않다. 차이콥스키는 가혹한 사회적 편견의 대표적인 희생자다. 37살까지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동성애를 의심하는 주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여제자와 결혼한다. 이것을 사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처절한 생존전략이라고 해야 할까. 결혼은 며칠 만에 파탄을 맞게 되고 죄책감에 시달린 차이콥스키는 자살을 기도한다. 자신의 비밀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그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조로한 그는 40대의 나이에 이미 치아가 빠지고 머리가 희어져 60대 노인처럼 보였다.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기에 ‘비창 교향곡’ 같은 그토록 비감하고 서정적인 선율이 탄생한 것일까.

 차이콥스키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을 때 그의 공식적인 사인은 콜레라였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콜레라로 숨졌다면 시신을 철저하게 격리했어야 하는데 장례식에서 그의 이마와 손에 키스를 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사망 원인에 대한 여러 설이 있으나 자살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의 동성애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밀 재판이 소집되었고, 재판부가 그에게 비소를 탄 물을 스스로 마시게 했다는 것이다. 자살이 그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한 국가의 배려였다니. 대의명분을 앞세운 폭력이 때로 더 잔인한 법이다.

 성에 대한 편견과 호기심이 교묘하게 결합된 것이 ‘카스트라토’다. 카스트라토는 당시 사회가 성에 대해 가졌던 이중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춘기 이전에 거세를 당한 소년은 남성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아 소년기의 목소리를 유지하게 된다. 또 여성처럼 흉곽이 확장되면서 비정상적으로 큰 폐를 갖게 되기 때문에 호흡이 길고 이를 기민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카스트라토가 내는 여성 음역대의 고음은 열정적이면서도 힘이 있었고 음색 또한 테너나 소프라노가 절대로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17~18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카스트라토의 인기는 폭발적이었고, 일단 카스트라토 가수로 성공을 하면 엄청난 부를 누렸다. 그렇다고 이들이 멸시와 조롱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은 아니다. 무대를 내려오는 순간 이들은 다시 현실의 괴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세상이 나아져서 이제는 커밍아웃을 한 사람도 연예활동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편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편견의 희생자는 성소수자만이 아니다. 다른 소수자들 역시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혹한 박해를 감내해야 한다. 몇 년 전 영국 정부는 튜링에 대한 유죄판결을 사과하고 특별사면을 실시한 바 있다. 그러나 고통 받는 이들에게는 지금 당장의 조그만 배려, 아니 적당한 무관심이 더 절실하다. 살아서 받는 고통을 사후에 보상받을 길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말이다. 차이를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는 일. 그것이 함께 가는 사회를 향한 첫걸음이다.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