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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유치함과 천진난만함 사이에서 길을 잃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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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정여울
문학평론가

학창 시절 ‘한 끗 차로 전혀 뜻이 달라지는 영어 단어’에 대한 선생님의 열강이 아직도 기억난다. considerable은 ‘중요한, 상당한’이란 뜻이고 considerate는 ‘사려 깊은’이란 뜻이며, industrial은 ‘산업의’란 뜻이지만 industrious는 ‘성실한’이란 뜻임을 외우고 또 외웠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낱말 쌍은 ‘childlike(순진한)’와 ‘childish(유치한)’였다. 똑같이 어린아이를 뜻하는 차일드(child)에서 왔지만 ‘차일디시’는 어린이의 나쁜 면을, ‘차일드라이크’는 어린이의 좋은 면을 부각시키며 천양지차의 뜻을 품고 있었다. ‘차일디시’라는 단어를 어른에게 쓰면 모욕의 뉘앙스가 스며 있다는 경고까지 들었다. 그 단어를 외우면서 나는 ‘차일디시한 어른’이 되지 말고 ‘차일드라이크한 어른’이 되어야지 다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이 든다. 유치함이 그렇게 나쁜 건가? 유치함을 어느 정도는 간직해야 건강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닐까. 마이클 잭슨의 여동생 재닛 잭슨은 너무 일찍 스타가 되어버려 어린 시절을 통째로 잃어버린 자신과 오빠의 삶을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말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한 사람들은 결코 제대로 된 어른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한 번도 어린아이가 될 기회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 나이에 맞게 살아갈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은, ‘억압된 것은 반드시 귀환한다’는 프로이트식 주장처럼, 끝없이 놓쳐버린 유년 시절을 아쉬워하며 뒤늦게 유치한 행동에 집착한다. 나도 어린 시절에는 ‘조숙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어른스러움을 연기하곤 했지만 지금은 ‘그때 좀 더 내 나이답게 살아볼 걸’ ‘어른들이 원하는 답이 아니라 그저 내 느낌을 거침없이 말하며 살아볼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그렇다면 어른스러움이 주는 고통은 무엇일까. 첫째,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해지는 것이다. 어른들이 뭐라 하든 아랑곳없이 춤추고 노래하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쑥스러워하며 낯을 가린다면 아이다움을 잃어가는 징후다. 춤추고 노래하는 기쁨보다 ‘어른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고민 때문에 잠 못 이룬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아까운 시간인데 말이다. 어른스러움의 두 번째 고통은 자꾸만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좋은 되새김질은 반성이나 성찰이 되지만, 나쁜 되새김질은 집착과 강박이 되어 ‘과거의 나’라는 포승이 ‘현재의 나’는 물론 ‘미래의 나’까지 친친 옭아매게 된다. 어른스러움의 세 번째 고통, 그것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다. ‘내일은 또 뭘 하고 놀까’가 유일한 고민거리인 아이들과 달리 어른들은 ‘내일 뭐 먹지’부터 시작해 ‘내일 출근하기 싫은데’ ‘노후는 어떡하지’라는 식의 고민 때문에 잠시도 ‘순수한 현재’를 살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의 가장 좋은 점은 ‘쓸데없는 생각’과 ‘쓸데 있는 생각’을 나누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나는 모든 일에 흥분했고, 모든 것에 호기심을 느꼈으며, 어떤 것도 쓸데없다는 이유로 버려두지 못했다. 지금은 생각이 피어오르기도 전에 이미 생각 자체를 자기 검열하는 ‘어른의 시선’이 나의 ‘소중한 유치함’을 잔뜩 짓누르고 있다. 어른이 되어서 가장 안 좋은 점 중 하나는 상처받기 싫어서 아예 새로운 도전을 회피하는 것이다. 꿈은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 비관하기, ‘어차피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라고 자책하기, 열심히 노력해봤자 어차피 제자리걸음이라는 생각. 바로 그 ‘어차피’가 어른스러움의 본질이었다. 피카소는 이미 열다섯 살 때 벨라스케스처럼 그릴 수 있었지만, ‘아이처럼’ 그릴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60년이 걸렸다고 한다. 어른 되기보다 아이 되기가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피카소는 온몸으로 느껴본 셈이다. 내 안의 어린아이를 달래고 다독이고 때로는 야단을 쳐서 ‘어른스럽게’ 만드는 것이 심리학의 기본 과제이긴 하지만 때로는 그런 심리학의 전형적인 해법에 염증을 느낀다. ‘무조건 어른스러워져야 한다’는 지상명령에 가려져 ‘어린애다움을 간직하는 법’이 바로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고 사는 것이 아닐까.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