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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의심의 혜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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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정영목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중국 춘추시대에 포숙은 관중이 여러 번 손가락질받을 만한 일을 했어도 좋은 쪽으로 이해해 주어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을 남길 우정의 터를 닦았다. 관중은 이를 고맙게 여겨 “나를 낳은 사람은 부모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포숙”이라고 말했다. 포숙은 관중을 깊이 알았기 때문에 미심쩍은 상황에서도 관중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포숙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춘추시대와 마찬가지로 세상은 전쟁터라는 관점이 힘을 얻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어떤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뭔가 미심쩍은 일을 했을 때 그 사람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거꾸로 내가 뭔가 의심받을 만한 상황에 놓였을 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해주기를 바라는가?

 영어에서 ‘benefit of the doubt’라는 말은 이런 상황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말이지만 관포지교라는 말처럼 한눈에 무슨 뜻인지 알기는 어렵다. 의심의 혜택이라니? 믿음이라면 몰라도 어떻게 의심이 혜택이 될 수 있는지 어지간한 상상력으로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사실 이 말은 원래 법정에서 나온 말로 이때 의심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주장이다. 즉 피고가 형사 법정에 섰을 때 배심은 일단 이 사람이 죄인이라는 주장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하며, 검사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여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피고의 죄를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우리 헌법에도 명시돼 있는 무죄 추정의 원칙과 곧바로 통한다.

 이런 원칙이 확립된 것은 물론 억울한 사람이 생기는 것을 막자는 뜻인데, 이는 곧 예로부터 혐의가 있으면 일단 유죄로 추정하고 비합리적 방법으로 증거를 꿰맞추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실제로 합리적 의심이라는 말이 영미 법정에서 사용된 것이 18세기 후반부터이니, 이 말이 근대 인권의 진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동시에 이런 합리적 의심이 법 제도의 합리적 재정비를 자극했으리라는 것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의심의 혜택이라는 묘한 말은 이렇게 법정에서 출발했지만 일상에서도 미심쩍은 상황에서 사람의 행동이나 말을 일단 좋은 쪽으로 해석해 준다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타인을 경쟁자, 나아가 잠재적 적으로 보는 근대세계에서 이 원칙이 일반적인 인간관계를 풀어가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의 제도적 원칙이 올바로 서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일상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실제로 세상을 살다 보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미심쩍은 상황과 관련된 사람을 일단 죄인으로 취급하는 태도와 믿어주는 태도 가운데 어느 쪽이 지배하느냐에 따라 사회의 분위기 자체가 상당히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심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려면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이것은 증거가 없으니까 봐주지 증거만 나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런 유보적 관용은 더 나은 인간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최저의 기준이며 다른 더 높은 수준의 인간관에는 못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히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원칙은 가령 종교적 수준의 너그러움에는 발을 뺄 많은 사람도 전쟁터에서라도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로서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

 둘째로 증거가 없으면 무죄라는 말은 증거가 확인되면 처벌이라는 말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느 한쪽을 무시하고 다른 한쪽만 지킬 수는 없다. 증거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강해질수록 입증의 합리성, 나아가 유죄가 확정된 자의 처리에 대한 합리성과 투명성도 강화된다. 반대로 그런 합리성과 투명성이 강화되면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무죄 추정에 더욱 더 너그러워질 수 있다. 따라서 명백한 잘못을 눈감아주면 다른 건 몰라도 인심은 훈훈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그 반대다. 한쪽이 흐릿해지면 다른 쪽도 흐릿해진다. 입증된 잘못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진정으로 너그러워져 의심의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정영목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