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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법정스님과 불일암 오솔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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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법정 스님의 의자’를 봤습니다. 2009년 봄, 길상사 법회에서 하신 말씀이 가슴에 맺힙니다.

"이 눈부신 봄날, 새로 피어나는 꽃과 잎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각자 이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참고 견디면서 가꾸어온 그 씨앗을 이 봄날에 활짝 펼쳐 보기를 바랍니다.
봄날은 갑니다. 덧없이 지나가요. 제가 이 자리에서 미처 다하지 못하는 이야기는 새로 돋아난 꽃과 잎들이 전하는 거룩한 침묵을 통해 듣기 바랍니다."

다시 봄입니다. 지난 3월 16일(음력 1월26일)은 법정스님 입적 5주기였습니다. 덧없이 다섯 해가 지났습니다. 입적 다섯 해 전, 우연히 한 번 뵈었습니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년이 지났지만 잠깐의 인연에도 차마 떨치지 못하는 아쉬움이 여태 남아 있습니다.

불일암으로 오르는 오솔길 사진을 찍으려 들렀습니다.
숲으로 난 그 오솔길, 예전부터 오가며 가끔 찾던 길입니다.
길은 삼나무 숲 사이로부터 시작합니다.
길인 듯 아닌 듯, 숲으로 난 흙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좁습니다.
오시되, 길벗 없이 혼자 조용히 오라는 듯 소담합니다.

삼나무 숲을 벗어나면 갈림길, 통나무로 만든 이정표가 나타납니다.
세로로 'ㅂ♧↖'표지만 있습니다. ‘불일암 가는 길’을 줄여 이리 표시했습니다.
걷되 말없이 걸으라는 듯 간결합니다.

가리키는 방향으로 250보쯤 걸으면 대나무 숲길입니다.
상좌 스님들이 손수 만든 나무 계단 길이 단아합니다.
길섶엔 걸터앉을 만한 통나무를 덩그러니 두었습니다.
예서 쉬면서 내 안의 나를 한번쯤 돌아보라는 듯합니다.

오가며 들리기만 했을 뿐, 작정하고 사진을 찍지 못한 터라 벼르고 별러 오솔길을 올랐습니다. 새벽 빛이 숲에 깃들기를 고대했습니다. 대숲에 이르자 난데없이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비를 피해야 했습니다. 서둘러 불일암으로 들어섰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암자, 요사채 쪽마루에 걸터앉았습니다.

암자의 살림살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채마밭엔 푸성귀·오이·더덕·토마토가 조금씩 심어져 있습니다.
바람에 일렁이는 대숲 끝자락, 해우소가 아담합니다.
이끼 낀 담벼락 밑, 비를 머금은 두 개의 김장독이 질박합니다.
본채 담벼락엔 대충 꿰맞춰 만든 나무의자가 주인을 기다리는 듯 덩그렇습니다.
어느 것 하나 넘침 없습니다.
법정스님은 이마저도 넘친다며 오대산으로 떠났다 했습니다.

비 구경, 살림살이 구경 삼매경인데 갑자기 인기척이 납니다.
스님 일행이 들어섭니다. 도둑질하다 걸린 것처럼 화들짝 놀라 일어섰습니다.
“뉘신가?” 바로 법정스님입니다.
“비를 피해 잠시 들어왔습니다.”
“많이 젖었구려, 들어갑시다.”
“괜찮습니다. 젖어서 구질구질해서 방에 들어가기가 뭣합니다.”
“어여 들어갑시다. 젖어 추울 텐데….”
못이기는 척 방에 들어서려는데 반가움 머금은 목소리가 들립니다.
“어허! 여기는 웬일이오?”
맏상좌 덕조 스님입니다. 서울 길상사에서 몇 번 뵌 인연이 있었습니다.

“오솔길 사진을 찍으려 왔습니다.”
“하필이면 궂은 날, 날짜를 잘못 잡으셨구랴.”
“날 잘 잡은 것 같습니다. 법정스님을 예서 뵙게 되었으니….”

절을 올리려 했더니 한사코 말립니다.
몰골로 짐작하셨던지 차와 요깃거리를 내오라 합니다.
“오대산에서 기거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서 뵐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송광사에 일이 있어 잠시 들른 게요.”
“오대산에서 어찌 사시는 지 궁금합니다. 한번 들러도 되겠습니까?”
“사람을 피해서 거기로 갔는데 ….” 허허! 웃기만 합니다.
덕조 스님이 한마디 거듭니다.
“거기는 아무도 못 갑니다. 저희들도 못 가죠. 그건 그렇고 법정스님 사진 한번 찍어주세요.”
“네. 꼭 그리하겠습니다.”
비 오는 산사, 따뜻한 차 한 잔, 그리고 법정스님의 살가운 정.
가슴에 묻어두고 헤아려 볼 기억 하나 자리를 잡았습니다.

차 한 잔의 호사를 누리는 사이, 비가 그쳤습니다.
오솔길 사진이 목적이니 서둘러 대숲으로 내려갔습니다.
비 그치니 바람마저 잦아들었습니다. 대숲의 움직임을 표현하려 카메라 셔터 스피드를 느리게 설정하고 촬영중이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먹물 옷의 법정 스님 일행이 숲길을 내려옵니다. 셔터 스피드를 다시 조정할 틈도 없었습니다. 4초의 시간 동안, 스님의 형체는 찍히지 않고 흐르는 듯 표현되었습니다.

법정스님 지나며 한마디 툭 던집니다.
"숲길 참 좋죠. 바람소리까지 찍어 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스님 사진은….”
그냥 웃으며 성큼성큼 길을 내려갑니다. 가던 길 그대로 손만 들어 인사를 건넵니다.

사실, 길 사진 먼저 찍은 후에 다시 올라가 스님 사진 찍을 요량을 했었습니다.
오솔길 사진 몇 장 찍을 사이, 이리도 빨리 가실 줄 짐작도 못했습니다. 손들어 인사 건네던 그 뒷모습이 제 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비움으로써 충만감을 느끼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뵙고 사진 한 장 찍어 두지 못한 아쉬움, 차마 비우지 못하고 여태도 남았습니다.
다시 봄입니다. 꽃과 잎이 새로 돋을 때마다 새록새록 돋는 아쉬움입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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