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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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 지구상엔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나라도 있다. 지난 10년동안 서독의 인구는 해마다 10만명 이상씩 줄어왔다.
우리 나라 같으면 쾌재라도 부를 일인데 서독의 매스컴들은 요즘 「게르만민족 멸종위기설」까지 떠들고 있다. 향후 50년 무렵이면 서독 인구는 무려 40%나 줄어, 지금의 6천2백만명에서 3천8백만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 원인분석이 재미있다. 아기를 가질수 있는 여성들이 지난 10년동안 평균, 1·3명의 자녀밖엔 갖지 않았다. 서독의 경우 한 부부가 적어도 2명의 자녀는 가져야 인구의 현상유지가 가능하다. 왜 자녀 갖기를 기피할까. 바로 서독 병 탓이다.
그 서독 병이 얼마나 심각한가는 우선 관광붐으로도 알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서독인의 외국여행 지출은 4배로 늘었다. 마르크화가 그만큼 외국으로 빠져나가면 그 돈의 힘도 함께 빠져나간다. 요즘은 서독에서 달러를 내놓으면 누구나 반색을 한다.
지난 7년동안 서독 근로자들의 시간당 실질임금은 40%나 늘었다. 반대로 노동시간은 선진국가운데 최저 수준이다. 주5일 하루 7시간 근무제.
게다가 근로 의욕마저 시들어 연평균 결근율이 7·7%나 된다. 이것은 일본의 1·5%에 비해 무려 5배 이상의 높은율.
서독은 풍요의 나라답게 사회복지도 충실하다. 병가를 연6주나 할수 있다. 물론 유급이다. 서독에선 2, 3일 정도의 무단 결근은 예사로 되어 있다. 이쯤 되면 「충실한」 복지라는 말이 무색하다.
이와 같은 서독 병의 근인은 바로 그 지나치게 충실한 사회복지에 있다. 서독 근로자들은 그런 제도를 위해 급료의 절반 이상을 세금 (조세부담률 32· 2%)과 사회보장 부담금 (19· 9%)으로 내놓고 있다. 땀흘린 보람은 허울만 좋고 실속은 없는 월급봉투로 나타난다.
성실도, 근면도 그런 월급봉투를 생각하면 맥이 풀린다. 차라리 놀러나 다니자는 풍조다. 외국여행 지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자니 자녀는 귀찮은 존재다.
오늘만 있고 내일은 없는 생활. 복지사회의 패러독스다. 한때 독일인들은 파울(faul)이라는 말을 가장 모욕적인 욕으로 알았다. 「게을러 흐느적거린다」는 뜻. 그러나 오늘의 게르만인들이 그런 말을 듣고 과연 얼마나 욕으로 생각할지 궁금하다.
차라리 우리는 행복한 편이다. 아직은 근면과 성실의 대가를 기대할 수 있다. 아니, 우리사회는 그런 미덕을 끝까지 지켜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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