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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미국 비판 문제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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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유럽의 행동하는 지성'으로 불리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85) 전 독일 대통령이 한국을 찾는다.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다음달 5 ~ 7일 열리는 '문명과 평화' 국제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방한을 앞두고 있는 그를 베를린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거의 매일 강연이나 행사에 참가하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 등 한국과 지구촌의 뉴스 흐름을 꿰뚫고 있었다.

-독일에서 대연정이 출범했다. 앙겔라 메르켈 정부에 거는 기대는.

"독일은 개혁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거대 정당 간 협력이 필요하다. 개혁을 위해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존재하는 한 대연정은 지속될 것이다. 물론 개혁은 쉽지 않다. 고통을 수반한다. 대연정 정부는 임기가 끝날 때까지 당파적 이해를 떠나야 한다. 표를 더 얻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독일 전체를 보고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유럽에서 개혁이 필요한 나라가 독일만은 아니다. 이탈리아.프랑스의 개혁은 우리보다 더 어렵다고 본다. 대연정의 중도세력이 용기있게 개혁을 추진해 주변국들의 기대에 부응하길 기대한다."

-올해로 통독 15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동.서독 지역 간 명암이 여전히 엇갈리고 있는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통일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는 지나갔다. 상황은 서서히 나아지고 있고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40년간의 분단으로 동.서독 간에는 큰 이질감이 생겼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절반은 넘긴 셈이다. 그동안 우리는 동독지역을 중점적으로 지원해 왔다. 동독 지역의 대표적 도시인 라이프치히는 25대 독일 대도시 중 '가장 살고 싶은 도시' 선호도 3위다. 순위에서 함부르크와 베를린을 앞선다. 동.서독 간의 경제적.사회적인 거리감은 많이 사라졌다."

-한국에서는 통일이 먼저냐, 아니면 평화 정착이 우선이냐를 놓고 논란이 있다. 같은 상황에서 독일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서독 정부는 1989년 10월 점진적인 통일을 위한 10개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동독의 갑작스러운 붕괴는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동독 주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점진적이고 조심스러운 접근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당시 격변하는 상황에서 동독인들에게 신중한 사리분별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갑작스러운 통일은 결코 서독 정부의 뜻이 아니었다. 한국과 독일의 상황은 다르다. 따라서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서독은 분단 시절 동독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다. 동독 주민은 매일 저녁 서독 텔레비전을 봤다. 그래서 서독이 어떤 나라인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통일에 대한 소원과 희망을 자연스럽게 키웠다. 그러나 북한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평화는 무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제정치적 협력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그래서 한반도 평화 유지를 위해서는 동북아 지역의 협력이 중요하다. 평화냐, 아니면 통일이냐 하는 이분법적 사고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물론 평화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 남북한이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고 현명하게 통일을 향해 나아가길 바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시작한 햇볕정책이 최근 빛을 많이 잃었는데.

"햇볕정책은 민주화와 더불어 한국 정부가 이뤄낸 큰 성과다.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도 햇볕정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6자회담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것인가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북한 등 모든 협상 당사자가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햇볕정책도 마찬가지다. 물론 어려움이 뒤따르겠지만 결국 성공을 거둘 것으로 믿는다. 그 필요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한국 사회의 좌우 이념 갈등이 매우 심각하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한국 상황을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곤란하다. 이념 갈등이란 다른 나라에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놀랄 일은 아니다. 미국에도 여러 가지 이념과 다른 주장이 있다. 독일에서 좌우 이념갈등은 시장경제를 따를 것인지 아닌지와 같은 경제사회적 발전 과정과 맥락을 같이한다. 한국의 이념갈등은 그와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최근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문제로 갈등을 빚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한국 내 좌파 지식인들의 행동이 맥아더 장군을 겨냥한 것인지, 아니면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정책을 겨냥한 것인지 성격이 분명치 않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상당히 민감한 부분이 있다. 미국에 대해 너무 비판적인 것은 문제가 있다. 마찬가지로 비판하지 않는 것도 물론 문제다. 그렇더라도 미국과의 돈독한 동맹관계를 무시하는 행위는 현명치 않은 것 같다."

-9.11 테러 이후 서구와 이슬람 세계의 갈등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문명 비평가 새뮤얼 헌팅턴이 경고한 문명충돌이 현실화하는 것인가.

"내가 베를린 시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터키를 방문한 일이 있다. 당시 현지 독일 대사는 베를린이 조만간 터키인들의 도시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독일이 터키인들을 너무 많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를린 시장을 지내고 보니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는 생각이 든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터키 출신 젊은이들은 독일 사회에 잘 동화됐다. 일부 사회 불만층이 코란을 가르치는 이슬람 학교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극소수다. 물론 문명 간 갈등 현상을 사소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적인 공간에서 종교.문화적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공적인 공간에서는 모두가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 서구는 이슬람 세계가 민주화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에 대한 지식과 존경이 부족하다. 서방 국가들은 이슬람 지역의 근대화와 문맹 퇴치, 권익 보호를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지구촌 곳곳에서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국경 없는 무한경쟁 등으로 국가 간 갈등이 커지고 있는데.

"세계화는 현실이다. 저항이나 폭동을 일으킨다고 저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세계화는 지구온난화 같은 환경 파괴를 초래해 지구를 곤경으로 몰아넣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부정적 현상은 전 지구적 노력이 없으면 막을 수 없다. 사회 정의를 외치는 투쟁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세계화 자체에 대항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세계화의 부작용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비록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작은 노력을 기울여 한 발씩 긍정적인 진전을 이뤄내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세계무역기구(WTO)의 중재 절차를 통한 문제 해결을 존중하고, 환경 보호를 위해 교토 의정서를 준수하려는 노력 등을 들 수 있다."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은

괴팅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법률가로 활동했다. 기민당 소속으로 69년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하원 부의장과 베를린 시장을 지낸 후 84년 연방총회(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89년 재선돼 10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ZDF 방송은 "대통령으로서 바이츠제커는 독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대통령 재임 중 그는 나치 독일의 범죄를 반성하고 독일과 독일인의 역사적 책임을 일깨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금도 유엔의 '미래를 연구하는 모임(IWG)' 공동의장과 독일 연방군 개혁위원회 의장, 국제발칸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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