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1)제80화 한일회담(140)|미국의 입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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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정부는 일본의 북송공식결정에 따라 종래까지의 결정저지를 위한 외교적 목표에서 관민이 혼연일체가 된 그 번복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조장관과 나는 우선 적십자국제위원회(ICRC)가 일본측의 협조요성을 거부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하기로 했다. 또 김병직수석대표를 유엔에 귀임시켜 유엔 및 한국전참전국을 상대로 북송저지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이에 따라 임수석대표는 뉴욕에 위임했고 제네바의 ICRC와의 교섭을 위해 김용식 주불공사를 파견했다.
이 대통령은 "이문제를 유엔에 제소하는 방안을 연구해보라"고 지시했으나 조장관. 임대사와 내가 협의한 끝에 이 문제의 유엔제소는 유엔구성원의 역학상, 그리고 미국의 모호한 태도로 실효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국제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한 국제홍보전에 나섰다. 양국의 재외공관은 이를 위해 맹렬히 움직였다.
뉴욕타임즈지는 한일양국의 이러한 행동은 극동평화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지적, 어떤 외부기구, 예컨대 유엔이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국제사회로부터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왜냐 하면 미국은 우리의 대일 비난 홍보조차 봉쇄하려는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송을 강제추방 운동이라고 비난한 우리성명을 미국신문에 광고로 게재한데 대해 미국무성은 이 같은 활동을 중지해 달라고 정식 요청해 왔다.
미국은 북송이 강행될 경우 북송선의 안전통항을 보장할 수 없다는 우리정부의 대일경고에 대해 미국이 원조한 무기를 북한이 아닌 제3국에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강력히 경고하는 등 우리의 북송저지운동에 오히려 제동을 거는 형편이었다.
물론 미국은 일본에 대해 은밀하게 북송문제를 한일회담에서 해결토록 종용하고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재미 중국인의 중공귀환을 허가한 자국정책의 전례가 있었던지라 거주지선택의 자유와 인도주의를 내세운 일본측 입장을 반대할 수가 없었다.
「다울링」주한·「맥아더」주일 미대사등은 나와 유태하공사를 만날 때마다 이자국입장을 설명하고 한일회담의 재개를 종용했다.
미국의 이같은 입장은 「기시」수상,「후나다」자민당외교조사위원장등 친한파인사들 및 「사와다」수석대표등과 같은 견해였다. 「사와다」수석대표는 「후지야마」외상의 북송정책은 ICRC의 협조를 얻지 못할 것이므로 그에 비해 한일회담을 열어 한일현안에 돌파구를 연다면 「후지야마」외상의 북송정책을 저지시킬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대통령은 일본이 먼저 북송정책을 공식으로 포기해야만 한일회담에 응할 수 있다고 완강히 고집했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그때 한일회담을 재개해서 현안타결에 응하는 유연한 자세를 보였더려면 정말로 북송이 실현되었을까 하는 의문과 혹시 북송이 실현됐더라도 그처럼 많은 숫자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ICRC가 일본의 협조요청에 응하지 않고 신중한 자세를 취해 북송강행을 추진했던 「후지야마」외상 일파가 59년 봄 일대 곤경에 빠졌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상술하겠지만 「후지야마」외상은 ICRC의 적극 협조를 얻을 수 없는 곤경을 타해키 위해 애초의 ICRC의 북송희망자 사전심사라는 방침을 변경해 북측과 직접 협상하는 전술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한일회담이 열리고 있었다면 상황은 상당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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