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말」의 시사 |김병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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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조지·오웰」의 『1984년』에 「오리말」이란 신어가 나온다. 「오리처럼 꽥꽥거리다」 라는 뜻인데 머릿속에서 생각하여 나오는 말이 아니라 입에서 그냥 줄줄 기계적으로 흘러나오는 말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말은 적이나 이단자에 대해 쓰여지면 오리처럼 그렇게 나쁜 말을 주절거린다는 비난이 되고 정통파에 사용되면 그처럼 열렬한 애국자란 찬사가 된다.
한 어휘에 대한 이 같은 상반된 내포에 당황할 필요는 없다.
가령 공공 요금의 「현실화」라면 국민의 입장에서는 그것의 인하를 바라는 것이겠지만 실제에 있어 그 말은 당국이 사용할 인상의 대체어 일 뿐이다.
말과 실제를 뒤바꿔 보면 이 예는 보다 선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일에 부닥쳐 머뭇거릴 때 그것을 좋게 말하면 신중하다고 하고 나쁘게 보면 우유부단하다고 말하며, 그 일에 과감하게 대들 때 그것을 환영하면 용기로, 못마땅하면 만용이라고 평가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하나의 어휘, 혹은 사태에 대해 우리의 판단과 선호에 따라 얼마든 상반된 내포 또는 표현을 갖게 된 셈이다. 한 친구는 「남이 하면 스캔들이고 내가하면 사랑」이란 재담을 해서 우리를 한참 웃겼지만 입장에 따라 우리의 평가와 의미부여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그 친구는 우리에게 거듭 생각케 만든 것이다.
같은 사태라도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표현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자연스런 일이기도 하고 나아가 우리의 다양한 견해를 보장해주는 심적 구조를 보여주는, 그래서 바람직한 것이기까지 한 것이지만, 그러나 사태가 항상 그렇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협조란 말로 재조정을 요청 받고 우리가 그 요청을 거부할 수 없을 때 그 협조란 말은 지시를 뜻할 것이며, 우리의 신고가 반려 당할 때 그 신고는 허가 사항으로 바뀔 것이다.
이런 경우 말은 말의 바른 뜻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뜻으로 전용되는 것이며, 이때의 의사소통이란 말과 실제와의 엄청난 거리를 앞에다 전제하고 의사적인 상태에서 진행되는 꼴이 된다. 이 거리가, 그러니까 입장과 입장의 거리가 공적이고 집단적인 관계를 벌려놓고 거기에 경직된 사고와 절대주의적 윤리성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 그리고 특히 정치적 언어일 때, 그것은 극히 심각한 양상을 빚는다.
이런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70년대에 즐겨 사용된 현실 「참여」란 말에서 찾을 수 있겠다. 참여란 말이 가령 권력층의 권고로 발언되었다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국민들의 협력과 순응을 가리켰다. 그러나 같은 말이 권력의 비판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다면 그 참여는 물론 현실 부패의 폭로와 저항을 촉구하는 말이 된다. 그래서 지식인이 평가 교수단에라도 「참여」하면 그가 현실의 개선을 주장했다 하더라도 비판 세력에 의해 「어용」이 되며 현실을 비판하는 주장은 실제 그 내용이 다르지 않다 하더라도 권력자에 의해 「불순분자」로 경계의 대상이 된다. 같은 「참여」의 역설이 이처럼 흑백의 상반된 불상용의 관계로 찢어놓은 것이다.
이런 예는 물론 「참여」란 말에만 그치지 않는다. 「민족주의」란 말이 얼마나 다른 용법으로 사용되었으며 「민중」이란 개념이 얼마나 엇갈려 쓰여지고 「자유」가 그 주창자들 간에 어떤 충돌을 빚었으며, 「민주주의」가 그 실천자들간의 갈등을 야기했고 「발전」이란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대립케 하였으며 「평등」의 주장이 얼마나 상반된 반응을 일으켰던가!
우리는 공적인 언어가 사적인 입장과 이해에 의해 분열되어 말의 바른 뜻이 뒤틀리는 경우를 숱하게 보아왔으며 커뮤니케이션의 기호로 전제가 되는 공통성을 우리의 말이 얼마나 자주 잃어버렸는가를 어렵지 않게 경험해 왔다.
공통의 분모가 없는 언어, 그러므로 공약될 수 없는 언어를 우리는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발언은 거의 언제나 회의 당하고 불신 받으며, 그래서 이청준이 그의 소설에서 말하듯이 우리가 언어를 배반했기 때문에 이제 언어가 우리를 배반하고 복수하는 사태에 부닥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령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어떤 지당한 말이 발언되어도 우리는 그 발언자가 어떤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인가 따져야 하고 어떤 문맥에서 그 말이 나왔는가 살펴야하며 그 말의 결과 뒤가 어떤 모습인가를 섬세하게 가려 보아야했다.
말에 대한 이 같은 의혹은 따라서 윤리성과 절대성을 요구하게 된다. 이를테면 내가 참여라든가 발전이라든가 평등이란 말을 쓸 때 그 말의 적합성이 어떻게 수립될 것인가의 문제는 뒷전에 놓이고 나의 의도로 그 말이 실천·관철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결단을 강조한다. 그리고 여기에 비판적이거나 회의하거나 무관심한 것까지도 모두 불순분자로 혹은 도피주의자로 도덕적 비난을 당해야 한다.
언어의 공통 분모가 없기 때문에 그 말의 의미는 무한히 외연 되어 예컨대 나의 「민족주의」가 옳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민족주의가 틀려야 하고 혹은 「반민족주의」로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주장은 근본 주의적인 맹목성을 띠게 되고, 맹목이란 남을 볼 수 없듯이 자신에 대한 반성도 허용치 않는 것이기 때문에 「전부가 아니면 전무」란 가장 간명한 구호를 택하게 된다.
이 택일적인 입장은 상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상대주의가 갖는 상호 존중, 공동의 기반 위에서의 토론과 같은 미덕의 실천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서로의 관계는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단절의 상태로 굳어버린다
70년대의 현실이 결과한 가장 나쁜 현상이 아마 이런 측면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순응하는 자와 거스르는 자, 결백한 자와 더러운 자로 분명하게 갈라져 있어 그 사이는 깊은 심연으로 단절되었다.
10여년 전 지식 사회에서 한잠 논의되었던 이른바 사회적 양극화가 뒤에 의식의 양극화, 판단의 양극화, 가치의 양극화로 극단화되었던 것이다. 마치 막대 자석으로 휘저어져 두개의 자장으로 나뉜 쇳가루처럼 우리는 어느 한 쪽으로의 평등을 요구받았고 그 양극의 어느 다른 자리에 우리가 놓이게 되면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했으며 이 모호한 위치에 선 사람은 회의주의자나 기회주의자로 힐난 당했다.
그러나 진실은, 다시 『1984년』의 용법을 빌자면,「좋다」와 「안 좋다」의 단 두마디 반대어중의 하나를 택하는 데서 드려나는 것이 아니라 그 극단의 선택지 사이의 넓은 편차 안에 무수히 널려 있는 다양한 표현법을 자유로이 찾아내는데서 실현된다.
우리 정신의 풍요로움은, 그리하여 조화로운 공동체적 언어를 획득할 가능성은 검은색과 흰색도 섞인, 그러나 그 사이의 오만가지 색깔들의 펼쳐짐 속에서 기대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결코 자석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리고 자석처럼 양극화되면 사회적 아노미가 극도에 이르고 그래서 입장만 다를 뿐 경직성은 마찬가지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에 중간색의 두터워야 함은 더욱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두터움이 곧 문화이고 지성이며 자유로움이 아닐까.
한 세대를 보내고 80년대의 중턱에 이르른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정치적 언어를 문학적 언어로 수정해 나가는 작업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여기에서 출발되는 것이다.

<필자 약력>
▲38년 경북 상주생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졸 ▲동아일보 기자 ▲기자 협회 회장 ▲문학 평론가 ▲『지성과 반 지성』『상황과 상상력』『지성과 문학』 등 ▲「문학과 지성」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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