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받아 들일줄 알때 삶도 더욱 풍요로와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대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번에 온국민을 놀라게한 부산의 대아호텔 화재 역시 사소한 부주의로 39명이라는 막중한 인명피해를 낸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더구나 초호화판으로 꾸며졌다는 사우나탕이 소방시설은 0점이었다는 점과 고층빌딩에서 으례 법적으로 갖추게 되어있는 비상 줄사다리 등이 전혀 제기능을 발휘할수 없었다는 사실은 소방행정의 결정적 맹점을 드러내준 사실이 아닐수 없다.
물론 뒤늦게야 16일 밤 뉴스시간에 앞으로는 대화재가 발생할 경우 시장·지사에게까지 그 경위를 문책하겠다는 당국의 의지를 밝혔지만 이러한 행정적 뒷마무리는 대화재사고 때마다 거의 습관적으로 표명해온 태도가 아닌가 의아해진다. 왜냐하면 이번 화재의 원인은 무슨 불가피한 원인이 아니라 부엌에서 조그마한 석유난로를 켤때도 상식으로 알고있는 「급유시에 불을 끄는 것」을 무시한데서 비롯된 사고이며, 또 사태이후에는 고층빌딩마다 매번 검사를 맡게되어 있는 「소화시설 점검」이 전혀 안되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지와 게으른 행정 탓으로 결국 귀중하고 절대적인 39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이 엄청난 희생이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시장·지사에 대한 문책으로 어떻게 안심할수 있을까. 그 죽음이 어제는 그들에게 찾아왔지만 내일은 당신에게 찾아오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수 있을까.
결국 우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할 매마다 괴롭지만 다시한번 냉정하게 자기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앞을 내다보도록 유도받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에 대한 준비」다.
또 우리는 불의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삵의 참다운 의미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옳은가를 자문하게 된다. 언제 우리 앞에 밀어닥칠지 모르는 그 죽음이 어느날 홀연히 나를 찾아왔을 때 의연하고 담담하게 죽어갈수 있다는 것은 훌륭한 생 이상으로 우리에게 큰 감동과 교훈을 준다. 이번에 희생된 사망자측의 한사람인 일본인 「무까이·구니오」씨(향방웅)의 경우도 적지않은 놀라움과 동정을 불러 일으킨다.
일본 갈강현에 소재한 월성화학의 해외과장으로 알려진 그는 사업상 우리나라에 왔다가 문제의 대아호텔에 투숙, 변을 당한 것인데, 15일 그의 유해를 인수해간 가족들에 의해 그가 어떻게 죽어갔는지가 밝혀진 것이다. 즉, 「무까이」씨는 사고당일 연기에 질식해 숨지기 직전에 볼펜으로 『연기가 나를 괴롭힌다. 움직일수 없는 것이 원통하다. 「아야꼬」(그의 아내)!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유서를 써서 양복속주머니에 넣어두었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 사실은 별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나에게는 적지않은 용기와 삶의 진지함을 가르쳐 주는 것같다. 사실상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생에 대한 설계와 성취에는 집착하지만 그 삶의 도상에서 반드시 오게 되어있는 죽음에 대해서는 오히려 거부하면서 살 때가 많다. 참으로 나에게도 죽음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할줄 아는 인격 속에서라면 적어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의 물질적 충족을 위해서 착취를 일삼거나 치부, 혹은 불량식품 및 불량상품 등을 만들수 없지 않을까.
적어도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일 정신적 여유가 있다면 살아가는 동안 서로에게 등을 돌리거나 가슴에 못을 박거나 살인을 일삼는 일은 없어지지 않을까. 또한 죽음에 대한 성찰이 있는 사람이라면 개인의 영달이나 이름 석자를 위해서 오욕된 역사를 만들거나 조작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살아가는 모습이 곧 우리의 죽음의 표상이라고 생각했을 때 「의미」보다는 「무의미」가 판을 치고, 「질」보다는 「양」이 우세하며, 「정신」보다는 「물질만능주의」가 「거룩한 자리」를 차지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 다함없는 절망을 품게된다. 그리고 어느 가톨릭 묘소에서 보았던 비문을 떠올린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