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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Big Questions'] 청년 단테가 베아트리체 만났다면 평생 기억했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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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호 25면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 당한 시인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를 그린 브론치노(Agnolo Bronzino)의 1530년 작품. 피렌체를 떠난 단테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과 외로움을 베아트리체란 ‘마음 속 고향’을 통해 달래려 했다.

1308년. 아름다운 고향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시인 단테는 질문했을 것이다. 왜 자신은 사랑하는 피렌체에서 살 수 없는 것일까? 무엇이, 언제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일까? 자신의 뒤틀린 운명을 설명하기 위해선 세상을 이해해야 했기에 시인은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것도 매우 긴, 천당과 지옥을 보여주는 시를 말이다.

이탈리아 언어의 기원으로 인정받는 단테의 『신곡』. 신곡에서 단테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가이드를 받으며 지옥과 연옥을 경험한다. 하지만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베르길리우스는 천국을 들어갈 수 없기에, 새로운 가이드가 필요했다. 바로 단테의 영원한 여인 베아트리체(Beatrice) 였다. 8살 된 베아트리체를 우연히 보게 된 9살의 단테. 그는 평생 베아트리체를 기억하고 사랑하기 시작한다. 귀여운 아이는 아름다운 여자가 되고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얼마 뒤 베아트리체는 죽는다. 불과 24살의 젊은 나이에 말이다. 더 이상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베아트리체.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단테의 기억 속에 존재했다. 베아트리체를 잊을 수 없었던 남자는 그녀를 위해 책을 쓴다. 『La Vita Nova(신생)』. 어머니의 다리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순간 다시 한 번 탄생한 단테. 30살에 완성한 책에서 그는 말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녀를 이젠 잊겠다. 지금부터는 그녀를 영원히 기억에서 지우겠다”고. 하지만 ‘영원’이란 단어는 인간에겐 허용되지 않은 것일까? 먼 훗날 『신곡』에 다시 등장한 베아트리체는 더 이상 아름다운 인간이 아닌 사랑·자비 그리고 성령 그 자체가 돼 버린다. 8살짜리 꼬마아이가 신이 돼 버린 것이다.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아침 해’(1952년). 호퍼는 고독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주변 환경이 바꾸는 뇌의 모양
3200년 전 어느 날. 고대 그리스 아카이아 연합군은 머나먼 트로이아로 출항한다. 하지만 연합군 사령관 아가멤논을 달갑지 않게 여겼던 아르테미스 여신이 바다의 바람을 멈춰버리자 아카이아인의 무시무시한 검은 배들은 무용지물이 된다.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것도 당장 말이다. 영리한 오디세우스에게 설득 당한 아가멤논은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Iphigeneia)를 그리스 최고 영웅 아킬레우스와 결혼할 것이라며 유인한 뒤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바친다.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여신은 이피게네이아를 머나먼 흑해(Black Sea) 타우루스 섬으로 데려가 그곳에 도착하는 이방인들의 목을 베어 제물로 바치도록 한다. 자신을 만든 아버지에게 속은 여인. 스스로도 외로운 이방인이면서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다른 이방인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이피게네이아. 마치 고독을 주로 그린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와 같이 그녀는 매일 아침 수평선에 뜨는 해를 바라보며 생각했을 것이다. 제발 오늘은 아무도 오지 말아 달라고. 아니, 누구라도 와 달라고. 아니, 절대 와선 안 된다고. 아니, 바로 제물로 바쳐지더라도 새로운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다고.

인간은 왜 고향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고 타국에서 살면 고향이 그리워지는 걸까? 왜 피렌체를 떠난 단테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과 외로움을 베아트리체란 ‘마음 속 고향’을 통해 달래려 했을까? 타우루스 섬에 갇힌 이피게네이아는 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이방인들을 죽이기 시작했을까? 이민·이주·망명·귀향·추방…. 이렇게 고향을 떠난 우리는 더 이상 그 전의 우리가 아니다. 이유는 뇌 발달과 연관돼 있다. 1000억 개 신경세포들 간의 수많은 시냅스(연결고리)들. 모든 시냅스들의 위치와 구조를 유전적으로 물려받기는 불가능하기에 뇌는 미(未)완성된 상태로 태어난다. 대신 뇌는 약 10년간의 ‘결정적 시기’란 걸 갖고 있다. 결정적 시기 동안 자주 쓰이는 시냅스들은 살아남고, 사용되지 않는 시냅스들은 사라진다. 결정적 시기의 뇌는 젖은 찰흙같이 주변 환경에 의해 주물러지고 모양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고향은 변해도 고향의 기억은 영원
고향이 편한 건, 어릴 적 경험한 음식, 소리, 얼굴들과 풍경,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뇌를 완성시킨 바로 그 원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란 존재를 만든 우리의 고향. 고향을 떠난다는 건 나란 존재의 원인과 이유를 의심하기 시작한다는 말과 같다. 질문이 무의미한 고향과 대답이 무의미한 타향.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할 수 있겠다. 만약 이민을 떠나지도, 망명이나 추방도 당하지 않았지만 내 고향이 더 이상 내가 자란 그 고향이 아니라면? 수백, 수천 년 동안 세상의 시계는 멈춰있는 듯 했다. 우연한 마을, 우연한 가족에서 태어나 죽도록 일만 하다 40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 그것도 그나마 운이 좋을 경우에만 말이다. 신·영웅·귀족이 아닌 평범한 인간에게 시간의 흐름이란 무의미했기에, 결정적 시기에 뇌를 완성시킨 세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불변의 진실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오늘.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은 예측 불가능하다. 오늘의 진실은 내일의 이단이고 어제의 패션은 오늘의 난센스다. 난 변하지 않았지만 세상이 변했기에, 난 내 고향에서조차 이방인이 돼 버린다는 말이다.

고향에서의 이방인이란 어떤 느낌일까? 10년이란 긴 전쟁을 끝내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 하지만 신들의 노여움을 산 그는 또 다시 10년 동안 고향을 찾아 유랑해야 한다. 눈 하나인 키클롭스 섬의 거인에게 잡히고, 마녀 키르케의 섬에선 동료들이 돼지로 변한다. 그리운 명절마다 고향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해외에 살면 갑자기 애국자가 돼 버리는 우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란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찡 해지는 우리. 태어나고 자랐기에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고향으로 향하는 우린 모두 오디세우스의 후손인 것이다. 그러나 잠깐! 키르케의 섬에서 탈출한 오디세우스는 지옥 하데스에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만난다. 여기서 그에게 물어본다.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냐고? 저명한 예언자는 말한다. “그래 오디세우스야, 먼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이타카로 돌아갈 것이다. 사랑스러운 아내를 품에 안을 것이고, 멋진 청년으로 자란 아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야,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네가 아는 고향에 도착한 넌 다시 네가 아는 고향을 떠나야만 너의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단다….”

죽을 고생을 해서 돌아가려는 고향이 고향이 아니며 진정한 고향으로 가려면 고향을 다시 떠나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율리시스』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1882~1941). 이 책의 주인공은 긴 하루의 유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집을 진정한 고향으로 느끼지 못한다.

무한의 고향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
아일랜드의 국민작가 제임스 조이스.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이름을 제목으로 한 그의 대표작 『율리시스』(Ullysses)는 주인공 리오폴드 블룸(Leopold Bloom)의 긴 하루를 마치 오디세우스의 18가지 스토리같이 보여준다. 거인 키클롭스의 얘기는 더블린 시(市)의 주점 이야기가 된다. 칼립소 여신과의 7년간의 사랑은 이클레스가(街) 7번지 얘기로 변한다. 길고도 긴 하루의 유랑을 마치고 아늑한 집으로 돌아온 리오폴드 블룸. 하지만 그는 정말 집으로 돌아온 것일까? 유대인인 블룸에게 집과 고향이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이스라엘을 떠나 2000년이란 긴 시간을 걸쳐 아일랜드까지 온 블룸의 조상들. 더블린에 있는 그의 집이 진정한 고향이 아닌 것 같이 오디세우스의 진정한 고향은 그리스 이타카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오디세우스의 진정한 고향, 아니 우리 모두의 진정한 고향은 과연 어디일까?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참을 수 없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다. 그리스 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 신들의 은총을 받는 아킬레우스. 그의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랑하는 노예 브리세이스를 연합군 사령관 아가멤논에게 빼앗긴 아킬레우스는 전쟁 참여를 거부한다. 이로 인해 그리스 인들은 트로이 전쟁에서 패배할 위험에 빠진다. 아킬레우스를 설득하러 온 오디세우스. 그는 이 세상 최고의 보물과 여자와 말을 약속한다. 하지만 아킬레우스가 원하는 것은 말도 여자도 보물도 아니었다. 자신의 연인 브리세이스와 이미 잠자리를 같이 한 아가멤논.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상상과 기억. 그 어느 보석으로도 바꿀 수 없는, 사라진 마음의 평온.

아킬레우스는 불가능한 것을 원한 셈이다. 세상에 산다는 것은 결국 거기서 거기다. 우리는 아가멤논과 같이 무의미한 이 세상의 부와 권력에 매달려 볼 수 있다. 오디세우스와 같이 존재의 무의미를 잘 알지만 지혜와 꾀를 통해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식·부(富), 그리고 나만은 다르다는 자부심 역시 세상과 타협하는 방법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타협을 거부한다. 더 이상 자신의 고향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세상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다시 돌려놓을 수 없는 시간,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인 것이다.

고향을 떠난 이방인들. 미국에 사는 한국인은 한국을 그리워하고, 한국에 사는 한국인은 과거를 그리워한다. 과거에 살던 사람들은 더 먼 과거와 더 먼 곳의 진정한 고향을 동경한다. 마치 망가진, 거꾸로 돌아가는 필름같이 온 세상 사람들은 잊어버린 세상을 그리워한다. 모든 인간의 고향은 동(東)아프리카이고, 인간의 고향은 바다였다. 바다의 기원은 지구란 작은 혹성을 만들어낸 우주의 먼지였다. 우주의 먼지는 빅뱅(Big Bang)에서 시작됐다. 빅뱅에서부터 나란 존재까지 단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존재들의 꼬리 물기. 무한으로 반복된 탄생과 소멸. 우리는 영원히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런 무한의 고향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쳤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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