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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논하다] 6. 안토니오 네그리(이탈리아 사회운동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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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일흔 살에서야 완전한 자유를 얻은 안토니오 네그리(오른쪽)는 나이보다 훨씬 젊고 활기차 보였다. 토론은 9월 26~27일 이틀에 걸쳐 프랑스 파리 7대학 근처 그의 소박한 아파트와 집 앞길 모퉁이의 한 카페에서 이뤄졌다. 그는 겸손했고 거처와 복장은 검소했다.

세계화 시대 지구호의 주권자는 누구인가?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그 실체를 '제국'이라 부른다. 제국은 초국가적 주권이다. 21세기 제국은 전 지구를 포괄하기에 외부가 없다. 또한 최후의 제국이기도 하다. 역사상 제국들이 그랬듯 21세기 제국도 전쟁을 통해 성장하고 전쟁을 통해 몰락한다. 21세기 제국의 흥망을 내다보는 네그리의 예언을 듣는다.

국제통화기금(IMF) 환란 시절에 사람들은 말했다. 우리는 주권을 잃었다고. 그 추웠던 시절을 아직도 많은 이가 생생하게 기억한다. 누구에게 주권을 잃었나? 이것이 새로운 점이었다. 일본도, 미국도, 소련도 아니었다. 어떤 국가의 소유도 아닌 국제통화기금, 바로 IMF다. 실체 없는 지배자, 군대 없는 점령군. 대부분의 국민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문제였다.

한국에서 IMF 외환위기가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제국(Empire)'이 출판되었다. 저자는 안토니오 네그리(72)다. '제국'은 출간되자마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냉전 종식 이후 변형된 새로운 국제질서를 딱 집어 규정할 말을 찾지 못했던 세계의 언론은 '제국'이라는 한마디에서 해답을 얻었다. '그렇다, 바로 제국이다. ' 제국이라는 용어가 순식간에 지구촌에 퍼졌다.

'제국'은 우리가 겪은 IMF 사태에 대해서도 정확한 설명을 해주는 것으로 보였다. 이제 이 지구의 주권자는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넘어선 초(超)주권, 바로 제국이라는 것이다. IMF가 바로 제국의 기관이다. IMF 본부 지하에는 쌓아둔 돈도 없고 탱크도 핵무기도 없다. 여러 나라에서 모인 경제학자와 통계학자의 집합일 뿐이다. 그렇지만 제국의 기관이기에 대한민국의 주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최근 부산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나 세계무역기구(WTO)도 제국의 기관이다. 유엔 산하의 여러 국제기구뿐 아니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같은 군사동맹도 마찬가지다.

네그리가 말하는 제국이란 세계화의 제국이다. 세계화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적 확산을 뜻한다. 제국은 새로운 전 지구적 주권 형태다. 제국의 주권은 단일한 지배논리로 통합된 일국적 기관과 초국적 기관의 연결망의 총체로 구성된다. 단일 국가의 주권은 쇠퇴하고 있지만 초국적 네트워크로 구성된 제국의 주권은 오히려 강대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21세기 제국은 더 이상 제국의 바깥에 그와 경쟁하는 다른 제국 또는 식민지를 두지 않는다. 전 지구를 포괄하는 하나의 제국이 존재할 뿐이다. 식민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제국 내부의 식민지일 뿐이다. 지배권 다툼이 있다면 제국 내부의 서로 다른 기관 간의 알력일 뿐이다.

걸프.코소보 전쟁의 주체가 바로 제국이다. 오사마 빈 라덴의 9.11테러는 단지 미국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제국에 대한 공격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역시 그 주체는 제국이다. 이것이 네그리의 '제국'이 던진 메시지였다.

'제국'은 세계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기했지만 동시에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네그리를 만나 그 의문을 풀고 싶었다. 프랑스 파리의 린네가에 위치한 그의 소박한 거처, 그리고 그 집을 나오면 바로 길건너에 있는 카페 아렌. 필자는 이곳에서 네그리를 두 차례 만났다. 간단한 소개가 끝나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제국'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복잡한 개념이다. 과연 현재의 세계 체제가 제국인가?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중심이 없고, 외부가 없고, 영토가 없는 제국이 가능한가? 미국 중심의 체제이지 않은가? 미국은 명백히 독립된 이해관계와 영토를 가진 하나의 주권국가 아닌가.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제국의 단일 중심이 되려 했고, 지금도 그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실패했고,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다. 상품과 금융과 지식과 노동이 전 세계적으로 거침없이 뒤섞이고 이동하고 있다. 세계화의 이 거대한 흐름은 어느 단일국가의 손아귀 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유엔과 IMF, 세계은행, WTO 같은 국제기구 안에서 미국과 다른 국가 간의 갈등이 존재한다. 이 기구들이 제국의 기관이라 하더라도 현존하는 국가들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가? 또 이라크전쟁에서 미국과 영국, 유럽은 분열되지 않았던가.

"국가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약화하고 있다. 미국이 강하지만 그 약점은 점점 더 드러날 것이다. 첫째, 미국은 전쟁으로 제국의 주도권을 쥘 수 없다는 사실을 점점 분명히 느끼게 될 것이다. 둘째, 미국의 예산적자와 무역적자는 통제하기 어렵게 커갈 것이다. 미국은 국제금융기관들을 통제하려 시도하겠지만 결국 다른 나라들과의 협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언론과 재야에서 이러한 목소리들이 커져 가고 있지 않은가. 이 과정에서 개별 국가의 주권을 넘어서는 초국적 주권이 형성되어 왔다."

필자는 자연스럽게 네그리의 책으로 생각을 돌렸다. '제국'은 제국에 관한 저술이자 제국에 저항하는 새로운 세력에 관한 저술이기도 하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99년 12월 시애틀에서의 반WTO 시위는 '제국'의 출판 직전 벌어진 사건이다. 당시 시애틀에는 세계 각처에서 6만여 명의 시위대가 모였다. 이들을 묶는 본부도 조직도 없었지만 너무나 효과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결국 WTO 회의는 무산됐다.

그들은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움직였다. 네그리는 '제국'에서 제국에 반대하는 새로운 세력을 다중(多衆.multitude)이라 불렀다. '제국'에 묘사된 다중과 시애틀의 시위 군중의 모습은 너무나 흡사했다. 마치 예언처럼. '제국'이 폭발적 관심을 끌게 된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와 하트는 2004년 '제국'의 후속 편으로 '다중'을 출판했다.

네그리가 말하는 '다중'은 제국이 그런 것처럼 중심과 영토가 없다. 국가.정당.계급.민족은 다중의 중심이 아니다. 다중은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있다. 제국 시대의 공장은 지구 전체고, 불안정한 고용 상태의 모든 사람은 사회적 노동자다. 이들이 다중이다. 다중의 노동은 근육 노동에서 점차 지식 생산과 소통으로 옮겨간다. 자본이 국경을 넘어가는 것처럼 다중 역시 국경을 넘는다. 이것이 네그리의 저서 '다중'의 요점이다.

필자는 '제국'과 '다중'에 깔려있는 낙관주의에 의문을 제기해 보았다. 지구화는 빈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지 않은가. 중심 없는 세계질서는 분쟁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지 않은가. 또 다중의 실체는 제국의 실체보다 모호하고 그 상태에 대한 묘사는 지나치게 낙관적이지 않은가. 네그리는 이러한 지적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낙관주의는 잠재성에 관한 것이라고 답했다. 제국이 제국을 극복하는 새로운 힘을 성장시키고 있으며 다중은 행동을 통해 존재의 불멸성을 실현할 것이라고 했다.

네그리는 토론의 말미에 '대안적 현대성'이라는 개념을 제기했다. 그동안 네그리는 현대성 개념을 비판하고 포스트모던 정치학을 주장해 왔기 때문에 이 대목은 의외였다. 대안적 현대성이란 무엇일까? 그는 뜻밖에 중국의 '천안문 사태'를 예로 들었다. 천안문 사태는 공산당 주도의 공산주의와,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모두를 부정하는 새로운 힘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그가 쓰고 있는 새 책은 제국의 주변부에서 성장하고 있는 대안적 힘, 대안적 현대성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네그리를 만나고 온 파리는 이제 아랍계 이민자의 소요로 혼란스럽다. 제국 시대의 이민자는 네그리가 말하는 다중에 속한다.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무너졌던 서로마 제국. 당시의 게르만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이방인이요, 야만인에 불과했다. 네그리가 말하는 다중이란 21세기 제국의 새로운 게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그 이방인이란 교회가 지배하던 유럽 중세의 한가운데서 "교회에서 멀수록 진리의 빛은 밝다"면서 중세 이후를 꿈꾸었던 새로운 철학자들의 희망과 닮아있는 것일까?

안토니오 네그리는
감옥에서 '제국' 저술
냉전 후 세계질서 예언

미국의 비교문학 교수인 마이클 하트와 같이 쓴 '제국'으로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 출신 사회운동가다. 이 책은 냉전 이후 세계질서를 예언적으로 압축 서술해 화제를 모았다. 특히 책이 나온 뒤 벌어진 9.11 테러와 이라크전쟁은 이 예언서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을 높였다. 2000년 책이 출판되었던 당시 그는 이탈리아의 감옥에 수감돼 있었다. 네그리는 1979년 알도모로 이탈리아 총리 살해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된 이래 오랫동안 이탈리아 공권력의 억압을 받았다. 수감 중이던 83년 급진당 의원으로 옥중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탈리아 법에 따라 의원에 대한 기소면제로 일시 출옥, 같은 해 9월 프랑스로 망명했다. 프랑스에 14년간 머물면서 파리 8대학 등에서 정치학과 철학을 가르쳤고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등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와 공동 작업을 했다. 97년 사면의 희망을 품고 이탈리아로 자진 귀국했지만 다시 수감되었다. 그가 완전한 자유를 되찾은 것은 2003년, 만 70세 때였다.

김상준 교수는

경희대 NGO대학원 소속이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와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도덕정치학의 사회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사회이론과 시민사회론, 역사사회학이다. 논저로 '한국 사회론' 'Inventing Moralpolitik'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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