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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식당가·골프장 "장사 말란 말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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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지난달 27일 서울 전국경제인연합회 콘퍼런스센터에서는 이례적인 ‘윤리경영 임원협의회’가 열렸다. 이른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제정안)’에 대한 대응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자리였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윤리경영 담당 임원 40여 명은 변호사의 관련 강의를 듣고 앞으로의 기업 경영 및 직원 관리·감독을 어떻게 할지 등에 대해 머리를 맞댔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 대기업 임원은 “직무관련성이나 대가성이 없어도 처벌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 활동에 적잖은 변화가 예상된다”며 “가뜩이나 어려운 경영환경에서 고민거리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라고 말했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김영란법 이야기다. 아직 시행까지는 1년 반의 시간이 남아 있지만 대기업과 유통업계는 물론 그렇지 않아도 이미 빈사상태에 놓인 식당가·골프장 등은 뜻하지 않은 ‘후폭풍’을 맞을까 벌써 전전긍긍하고 있다.

 우선 재계에서는 그간 관행적으로 이뤄져 온 대관(對官, 정부·공공기관 상대) 업무에 대대적인 수술이 불가피하다. 한 대기업 대관 담당자는 “사실 청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정보 교류 활동을 위한 목적이 컸다”며 “앞으로는 일일이 얼마를 사용했는지 따져가면서 사람을 만나야 할 상황이 됐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이어 “기업인과의 접촉이 줄면서 정부·정치권에 현장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고 덧붙였다.

 정부·정치권과의 어두운 연결고리를 끊는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정당한 기업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명지대 조동근 경제학과 교수는 “폭넓은 경영활동을 법의 잣대로 재단할 경우 자칫 경영이 위축되는 부작용을 빚을 수 있다”며 “광범위한 적용 대상과 엄격한 법 적용에 따른 과잉 입법으로 법이 사문화되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당장 유통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주요 구입처인 법인의 씀씀이가 줄면서 선물 수요나 자영업자의 영업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명절 때는 선물 매출의 30∼40%가 법인에서 나오기 때문에 매출 감소가 클 것”이라며 “상품권 액수의 단위를 줄이고, 3만원 미만의 선물세트를 내놓는 방안 등이 아이디어 차원에서 나오고 있다”고 귀띔했다.

 특히 ‘식대 3만원 제한’에 일부 음식점 사이에선 볼멘소리가 나온다. 20년 넘게 강남에서 한식집을 운영하고 있는 A씨는 “1인당 3만원 아래로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며 “물가도 뛰었는데 장사하지 말란 말이냐”고 탄식했다. 서울의 한 유명 호텔 관계자도 “호텔은 점심식사 기준으로 5만원이 마지노선”이라며 “고객이 기대하는 퀄리티나 서비스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골프장업계는 가장 큰 타격이 예상된다. 수도권 프라이빗 골프장의 P대표는 “주말의 경우 법인카드 비중이 50%를 넘는데, 이들 대부분을 김영란법 대상으로 봐야 할 것 같다”며 “최근 나온 골프 대중화 및 활성화 방안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라고 걱정했다.

 소비 위축이 고가 서비스·상품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기업들이 이 법을 의식해 대외 협력업무 예산을 줄이고 소비 심리가 위축되면서 ‘도미노’식으로 내수시장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처벌 대상에는 교통·숙박 등 편의 제공도 포함되기 때문에 리조트·여행업·항공업까지 파장이 미칠 수도 있다. 한 외국계 기업 관계자는 “50만원 이상 접대비는 증빙자료를 남기도록 한 ‘접대비 실명제’가 폐지된 지 10년이 됐지만 지금도 많은 기업이 50만원 이상을 쓰지 않는다”며 “만나는 횟수를 줄이면 당연히 식당 등 일반 자영업자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물론 앞으로 기업 경영이 보다 투명해질 수 있다는 기대도 적지 않다. 2004년 통과된 정치자금법 개정안, 이른바 ‘오세훈법’도 초기에는 기업 활동 위축 우려가 있었지만 긍정적 효과가 더 컸다는 것이다. 전경련 신석훈 기업정책팀 팀장은 “재계도 법안 취지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다”며 “기업 준법경영 시스템을 신규 법안에 맞춰 변모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손해용·이소아·박미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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