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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방' 견제 신호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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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중국의 정치개혁을 주장했던 후야오방(胡耀邦)전 공산당총서기의 탄생 90주년 기념식이 18일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그가 1989년 4월 사망한 뒤 공산당이 그를 위해 처음 치른 공식 행사다. 공산당은 그동안 그를 국가 지도자 반열에 올리지 않았다.

공산당 좌담회 형식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참석했으며 당 서열 5위인 쩡칭훙(曾慶紅) 국가부주석이 추모 연설을 했다. 우관정(吳官正) 정치국 상무위원이 사회를 맡았으며 350여 명의 당.정.군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중국 당국은 소요.시위 사태를 우려해 인민대회당 근처에 정.사복 경찰을 대거 배치했다. 한국을 방문 중인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그의 생애를 기리는 서신을 보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 후야오방 재평가 뒤 정치개혁 추진되나=후야오방 사망 직후 공산당은 조사(弔詞)에서 그를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이자 정치가, 탁월한 영도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87년 총서기직을 물러날 때 후는 당 정치국 즉결 조치를 통해 쫓겨나다시피 퇴진당했다. 최고 지도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은 86년 12월 베이징 천안문의 학생시위 때 후야오방이 소극적으로 대처하자 그를 전격 숙청한 것이다. 당 규정대로라면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결정할 사안이었다. 그래서 중국 전문가들은 이번 행사에 '후야오방 복권'의 뜻이 담겼다고 해석한다. 일각에선 "'복권'보다 '재평가'란 용어가 적합하다"고 말한다.

베이징의 외교 소식통은 "이번 행사의 의미가 무엇이든 현 지도부가 정치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4세대 지도부의 핵심인 후진타오 주석이 후의 복권을 강력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 당 지도부의 갈등 확대되나=이번 행사를 계기로 후진타오 측근 세력과 정치개혁에 반대하는 장쩌민(江澤民) 전 총서기의 이른바 '상하이방(上海幇.상하이 출신의 파벌그룹)'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나온다. 상하이방이 덩샤오핑의 노선에 따라 양적 성장을 추구한다면 후진타오 중심의 공청단 그룹은 균형 발전.빈부격차 축소를 우선시한다. 한 소식통은 "10월 열렸던 공산당 제16기 제5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지도부 간의 의견 불일치 현상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번에 후야오방 재평가 행사 규모가 당초 계획보다 크게 축소된 것도 후진타오 견제세력의 반발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베이징=유광종 특파원

1989년 추모식이 천안문 사태로 발전
후야오방은 누구

후야오방(胡耀邦)은 '6.4 천안문 사태'의 도화선을 제공한 중국 현대사의 풍운아다. 1982년 당 총서기에 취임한 뒤 당시로선 과격한 개혁 프로그램을 주창했다. 그의 정치적 후견인 덩샤오핑(鄧小平)과 전혀 다른 노선이었다. 총서기직에서 물러나 그는 실의에 빠져 생활했다. 89년 4월 15일 그가 사망하자 학생.시민들은 천안문 광장에서 대규모 추모행사를 열었다. 그 과정에서 부패 척결.정치 개혁 등의 구호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덩샤오핑은 군대를 동원해 이들을 유혈 진압했다. 수백 명이 총탄에 맞아 숨졌다. 그것이 바로 '천안문 사태'다.

그래서 후의 재평가 문제는'천안문 사태 재평가'와 맞물려있다. 공산당 지도부는 천안문 사태를 거론하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다. 전.현직 지도층의 정치적인 평가와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후야오방과 개인적인 인연이 깊다. 그의 아들 더핑(德平)과 후진타오는 친구 사이다. 그는 공산당 중앙당교 교장에 재임했던 81년 아들의 소개로 후 주석을 만났다.

후야오방은 후 주석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적극 도와줬다. 그는 77년 당 조직부장으로 활약할 때 ▶문화혁명 종결 ▶덩샤오핑의 복권에 앞장섰다. 문혁 피해자였던 수많은 지식인.관료들을 구제해 그를 지지하는 계층도 폭넓다.

베이징=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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