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방낭의 길"에|"중동의 풍운아" 아라파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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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동의 풍운아라는 별명에 걸맞게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은 또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야만 했다. 이번은 앞서와는 달리 자신의 부하들이었던 반란군에 밀려 트리폴리를 떠났다. 이번 트리폴리로부터의 철수는 「아라파트」에게는 네 번째 방랑의 길을 떠나는 것이된다.
첫번째가「검은 9월」이라 불리는 70년9월 요르단에서 좇겨난 것이고, 두번째가 76년 레바논내전의 와중에서 「탈·알·자테르」마을로부터, 세번째가 작년이스라엘의 레바논침공으로 8월에 베이루트로부터 1만1천명의 전사들과 함께 떠난것이다.
지난 11월초부터 트리폴리 외곽에서 친·반「아라파트」세력간 무력충돌이 벌어진 PLO내분의 원인은 작년6월 이스라엘의 레바논침공사태에 기인한다.
당시「아라파트」는 무력하게 한달도 버티지 못하고 남부레바논을 몽땅 이스라엘에 내주고 두달만에 베이루트를 포기했었다.
레바논에서의 군사적패배 그리고 사브라 샤틸라 대학살사건을 막지 못한 책임을 둘러싸고 PLO내에서 「아라파트」를 비난하는 소리가 높게 일어났다.
게다가 「아라파트」는 요르단의 주권아래 요르단강서안에 팔레스타인행정국가를 설립한다는「레이건」의 중동평화안에 동조, 70년 치욕의 9월을 상기시키는 요르단의 「후세인」왕과 협상을 하겠다고 나섰다.
이같은 「아라파트」의 태도는 PLO내 강경파를 격분시켰으며 PLO내 내분까지 거쳐 결국은 「아라파트」가 이끌던 파타그룹은 두동강이 나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사태로 까지 번졌다.
지난 11월초부터 시작된 이 동족의 싸움에 시리아는 2개사단의 병력을 보내 「아라파트」반란 세력을 지원했고 심지어 리비아와 이란의 민범대까지 끌어들였다.
시리아가 이 싸움에 적극 개입하게된 것은 온건아랍국들의 지원을 받은 「아라파트」를 TL0에서 축출하고 「아라파트」에 반기를 들었던 「아부·무사」 「아브·살레」등 파타그룹내 강경파인물들을 내세워 PLO를 손아귀에 넣자는 속셈이다.
그렇게되면 시리아는 PLO의 대부로 팔레스타인문제가 핵심이 되고 있는 중동문제를 자기 의지대로 이끌어 갈수있고 나아가 대이스라엘투쟁의 명분까지 얻을 수 있어 아랍권의 강음로 군림할수 었게 된다.「아라파트」가 트리플리를 떠나게 되는데까지 가장 큰 장애요소가 됐던 것은 이스라엘의 강경태도였다.
이스라엘은 적인 「아라파트」와 휘하의 전투요윈들을 무장한채 그냥 떠나보낼수 없다면서 여러차례 트리폴리항을 포격하는등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같은 이스라엘의 태도는 이들이 무기를 들고 다른곳에 가면 두갈래의 PLO를 상대해야하는 부담이 생기고 게다가 레바논에 강경파만 남게될 경우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행동이 더욱 격렬해 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제 「아라파트」는 작년8월 베이루트에서 쫓겨난 후 PLO임시본부를 설치했고 지난9월 지지세력규합을 위해 트리폴리로 가기전까지 머물렀던 튀니지로 다시 돌아가 재기를 다짐하기 위한 전열을 재정비할 것으로 보인다.
비록 「아라파트」가 옛부하들로부터 『팔레스타인혁명의 반역자』라는 치욕의 비난을 듣고 이빨빠진 사자처럼 모든 군사적 거점을 잃었지만 그가 "윈생불능의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만큼「아라파트」는 지난 20년동안 전쟁터와 외교무대를 누비며 막아 놓은 그의 경륜이 빛나고 있으며 사실 아직도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를 지도자로 지지하고 있다.
그가 우선 할일은 자기가 이끌고 있는 파타그룹의 총회를 소집하는 일이다.「아라파트」에 대한·반란이 바로 PLO내 8개 그룹중 최대의 조직인 파타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파타그룹을 재정비한 후에는 팔레스타인망명의 회인다마스커스소재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 (PNC)를 소집해 PLO의장의 지위를 재신임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신임을 받는다해도 군사적 투쟁거점을 잃었고 강경파로부터 배척을 당한 이 상태에서 옛날의 영광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규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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