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러시아의 불의를 고발한 야권 지도자

중앙일보

입력

때론 죽음이 더 웅변한다. 지난달 27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인근에서 암살 당한 야권 지도자 보리스 넴초프가 1일 주도하려던 집회는 그를 추모하는 자리가 됐다. ‘평범한’ 집회였을 자리는 그러나 수만 명이 모여 ‘푸틴 없는 러시아’를 외치는 대규모 행진이 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도 들릴 정도로 지척인 곳에서다.

시위는 이날 오후 2시부터 시작됐다. 모스크바 시내의 키타이고로드 광장 주변에 수천 명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오후 3시15분쯤부터 넴초프가 숨진 크렘린궁 옆 ‘볼쇼이 모스크보레츠키 모스트’ 방향으로 행진했다.

이들은 넴초프의 사진이 담긴 피킷을 들었다. ‘나는 두렵지 않다’ ‘투쟁하라’는 플래카드도 보였다. 침묵 속에 걷던 이들은 크렘린궁에 다가가자 목소리를 높였다. “푸틴 없는 러시아”“잊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란 구호를 외쳤다.

피살 현장엔 추모 꽃다발과 초로 가득했다. 미하일 카시야노프 전 총리가 그곳에서 “넴초프 살해자들을 반드시 찾아내 처벌할 것”이라며 “이들은 자유와 진실에 반대하는 세력”이라고 비판했다. 시위에 참여한 배우 라다 네그룰은 “넴초프 살해 배후는 명백히 크렘린”이라며 “푸틴 대통령이 살해를 직접 지시하지 않았더라도 그에게 아첨하려는 측근들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언론을 통해 증오심을 불러 일으킨 것 등이 이번 사건의 배경”이라고 주장했다.

주최 측 추산으로 7만 명이 참가했다. 소비에트 이후 최대로 일컬어지는 2011년 12월 의회 선거 조작 의혹에 따른 반정부 시위 이후 가장 큰 규모다. 영국 가디언은 그러나 “폭발적인 분노라기보단 조용한 경악 쪽”이라고 전했다. 시위대와 경찰 간 큰 충돌도 없었다.

러시아의 제2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6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중부 도시 니즈니노보고로드, 시베리아 도시 노보시비르스크 등은 물론 영국 런던과 프랑스의 파리에서도 동조 집회가 열렸다.

한편 이날 시위에 참가하려던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 알렉산드르 곤차렌코가 모스크바 시내에서 체포됐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지난해 5월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오데사의 한 노조 건물 방화 사건의 피의자로다. 당시 친러시아 인사 40여 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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