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저가담배 도입론은 대국민 기만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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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호 02면

설 연휴 밥상머리에 오른 정치 얘기의 메인 메뉴는 개각도, 야당의 상승세도, 상처투성이 신임 총리도 아니었다. 저가담배였다. 불을 지핀 건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였다. 17일 원내대책회의에서 기존 담배보다 가격이 저렴한 담배 도입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경로당 등 민생현장에서 의견을 수렴했다고 한다. 이튿날엔 전병헌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이 맞장구를 쳤다. 저가담배 활성화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봉초담배(직접 말아서 피우는 담배)에 한해 세금을 일부 감면하자는 구체적 방안도 제시했다. 모처럼 저가담배 도입에 여야가 의견일치를 본 셈이다.
 담배소비세·지방교육세·부가가치세·국민건강증진기금 이외 신설된 개별소비세까지 4500원의 담뱃값 중 약 75%가 세금이다. 시중엔 “담배를 피우는 게 아니라 세금을 피우는 것”이라는 자조가 적지 않다. 담뱃값 인상이 ‘꼼수 증세’임은 국민 모두가 아는데 유독 정부만이 ‘국민건강’이라고 기를 쓰고 주장해 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의 흡연율을 낮추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지였다.
 그런데 어떻게 시행 두 달도 안 돼, 그것도 여당 지도부에서 먼저 저가담배 얘기를 꺼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동안 국민건강이란 구호는 결국 담뱃값 인상을 위한 대국민 기만행위였음을 ‘대리 자백’한 것 아닌가.
 현재 거론되는 100개비에 1만원짜리 저가담배를 만들기 위해선 생산비를 낮춰야 한다. 필터의 성능을 떨어뜨리면 흡연자의 건강엔 더 해로울 수밖에 없다. 건강을 위한다며 값을 올렸다가, 반발이 커지자 값과 품질을 다시 낮춰 오히려 건강을 망가뜨리는 뒤죽박죽의 상황이 되는 꼴이다. 이럴 바에야 뭣 하러 값을 올렸나. 그러니 “노인들 빨리 죽으라고 저가담배 내놓는 것이냐”(주명룡 대한은퇴자협회장)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물론 유 원내대표의 고민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율이 흔들리고, 핵심 지지층이 등을 돌리는 와중에 보수의 본향인 TK에 지역구를 둔 그로서는 어느 때보다 설 민심에 촉각을 세웠을 것이다. 노년층의 불만을 조금이라도 달래고자 ‘어르신을 위한 저가담배’라는 고육지책을 꺼냈을 성싶다.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책임 있는 정치인으로서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의 구분은 명확히 해야 한다. 집권여당 원내대표인 그의 발상은 담배 얘기로만 그치는 게 아니다. 박근혜 정부의 개혁 정책에도 그림자를 드리울 여지가 있다. 공무원연금 개혁 등 4대 개혁을 추진하면서 이해당사자들이 강하게 반발할 때마다 마치 저가담배 내놓듯 한 걸음씩 물러설 텐가. 가뜩이나 ‘10개월 시한부 내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국정동력이 흔들리는 판에 여당마저 오락가락한다면 어떻게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겠나. 최소한의 신뢰 회복이라도 하고 싶다면 저가담배는 아예 없던 일로 하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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