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지」만 24년 …김정호가 사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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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상 받을 만큼 잘한 일은 없어요. 그저 한곳에서 한눈 안 팔고 오래있으니 주는 것이겠지요.』
83년도 청백리상 수상자로 뽑힌 국립지리원 측지기좌 김영호씨(56)는 『공무원이 제할일 했는데 무슨 상이냐』며 쑥스러운 표정이다.
59년7월 국방부 지리연구소 측량과 군속으로 공무원생활을 시작한 전씨는 내무부건설연구소·국토건설청건설연구소·국립건설연구소등 행정기구개편으로 소속이 바뀌기는 했지만 「측량」이란 업무를 떠난 적은 단 하루도 없다.
그의 24년5개월의 공무원생활은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선생의 고행을 연상시킬 정도.
그가 동료들과 함께 해낸 가장 큰 일은 6·25로 망실된 국토측량의 삼각점과 수준점을 되찾은 일이다. 국토위치의 기본이 되는 삼각점과 높이의 기준인 수준점은 191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 각각 1만6천여점, 7백30점이 설치됐으나 6·25로 인해 80% 이상이 훼손됐다.
주로 험한 곳만을 맡아 삼각점 6백85곳을 조사했고 2백53점을 복구했으며 수준점 2백15점을 그가 설치했다. 이 모든 일이 산꼭대기에서 하는 일이라 5백m가 넘는 남한의 산중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
1년 중 6개월 이상을 산과 해안을 따라 다니다보니 1천m이상의 산에 표석·시멘트·물을 지고 으르는 정도는 보통일 정도로 산사나이가 됐다.
『조사 나갔다가 멧돼지를 만나 생명을 잃을 뻔한 경우도 많았고 식량이 떨어져 2, 3일씩 굶은 일도 많았습니다.』
남이 안 다니는 산을 거지행색으로 헤매다 간첩으로 오인돼 「체포」되는 일도 있었고, 독도등 낙도조사를 나갔다가 풍랑으로 보급선이 끊겨 풀뿌리 미역을 따먹으며 어려운 고비를 넘기는게 다반사였다.
『요즘은 전국을 5천분의1 지도에 그려 넣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1만장중 7천여장이 끝나 86년이면 이 작업이 모두 완성됩니다.
가장 맥빠지는 일은 산꼭대기에 힘겹게 만들어놓은 삼각점의 표석이 깨어지거나 없어지는 일이지요. 그늘에서 애쓴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런 분들이 없었으면 합니다』
지금도 도시락을 싸들고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산에서 단련된 다리로 사무실까지 걸어다닌다. 아들과 사위의 헌 양복을 줄여만든 옷을 입고있다.
박봉의 공무원인 그가 8명의 동생과 4남매를 어엿이 키워낸 데는 부인 정정옥여사의 눈물겨운 내조의 힘이라고 주위에서는 얘기한다.
전씨가 국방부지리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청량리에서 8년간 혼자 자취생활을 할 때 부인은 고향 영월에서 8백평의 텃밭을 일구고 하숙을 쳐 생계를 꾸렸다.
자녀교육을 시키는 동안 전세집을 전전하다 78년 고향의 텃밭과 전세금 및 융자금으로 지금의 19평짜리 한옥을 마련했다.
『봉급 생각하면 공무원생활을 어떻게 합니까. 그저 천직으로 알고 누가 해도 해야 되는 국가사업이니 내가 한다는 마음이라야 버티지요.』
가장 안타까운 일은 자기들의 사표인 고산자선생의 동상건립을 못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의 측량·지도제작기술이 이제는 측지위성전파수신장치까지 갖추는 정도로 수준에 올라선 것이 보람이라고 했다. <김현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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