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승옥은 시사만화가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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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젊은 시절의 소설가 김승옥上과 그가 대학교 1학년 때 그렸던 시사만화 ‘파고다 영감’ 의 첫번째 작품.

시사만화가 김승옥(64). 어쩐지 낯설다.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등을 내며 1960대 고단했던 시절, 이른바 주류 사회에서 벗어난 아웃사이더들의 감수성에 불을 댕겼던 그 작가를 말하는가.

그렇다. 김승옥의 출발은 소설가가 아니라 만화가였다. 그것도 일간지에 네 컷 시사만화를 그리며 작가의 자의식을 키워갔다. 나이는 만 열아홉, 즉 서울대 불문과 1학년 시절이다. 4.19혁명이 일어난 지 넉 달 뒤부터 그 해 창간됐던 서울경제신문에 '파고다 영감'이란 네 컷 만화를 134회 연재했다.

당시 필명은 김이구. 고향집(전남 순천시) 번지수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다. 4.19 직후부터 5.16 직전까지 혼란했던 우리 사회를 구석구석 꼬집었다. 김승옥과 함께 45년 전으로 돌아가면….

①한 지게꾼이 장관 사무실에 와서 도시락 배달국을 설치하자고 제안한다.(60년 9월 1일) 이승만 정권과 단절했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점심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던 장면 정권, 일명 도시락 정권을 풍자.

②전국노래자랑에 변호사가 출연해 "원흉을 따르자니 데모가 울고 데모를 따르자니 원흉이 운다"고 노래한다.(9월 13일)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당시 사법부를 희화화.

③쌀값이 내렸다는 소식에 내린 돈 만큼 과일을 산 임산부가 오후에 쌀가게에 갔더니 다시 쌀값이 올라 저녁을 굶게 된다.(61년 1월 27일) 하루가 다르게 요동쳤던 물가를 개탄.

우리가 그간 잘 몰랐던 만화가 김승옥은 신간 '혁명과 웃음'(천정환 외 지음, 앨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30대 국문학자 세 명이 만화를 찾아내고, 그와 연관된 당대 한국 사회도 꼼꼼하게 재현했다. 정치.경제.문화.스포츠 등 사방으로 뻗은 김승옥의 '촉수'를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문학은 물론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를 돌아본 '르네상스인 김승옥'(백문임 외 지음, 앨피)도 함께 발간됐다. 작가는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나 최근 증세가 호전됐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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