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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도승지의 나라' 비정상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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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대통령-국회의장-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국무총리. 행정자치부의 정부의전편람에 나온 국가의전서열 톱5입니다. 김대중 정부, 김종필 총리와 김용준 헌법재판소장 때의 일화입니다. 사건데스크였던 필자는 일선기자가 보내온 인물 기사를 무심코 넘겼다가 헌법재판소에서 거센 항의를 받았습니다. “서열이 엄연히 정해져 있는데 기사에서 총리 다음으로 소장을 언급했다”는 항의였습니다. 공직사회에서 의전은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정책에 실패하면 꿀밤이지만 의전에 실패하면 볼기짝입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의 의전서열은 어떨까요. 경제부총리·사회부총리는 물론이고 미래창조과학부 장관보다 낮은 18위입니다. 주요 장관급이라고 보면 됩니다. 김기춘 실장의 실질적인 위상을 감안하면 국민인식과 정부편람의 간극은 매우 큽니다. 한 주간지는 1989년부터 매년 ‘누가 한국을 움직이나’ 전문가 조사를 해왔습니다. 2014년 기준 결과가 최근에 나왔습니다. 김기춘 실장이 6위였습니다. 이 조사 이래 비서실장으로는 최고 순위였습니다. 노무현·이명박 정부 내내 비서실장이 톱20에 오른 적이 없었으니까, 김 실장이 극히 이례적인 ‘대접(?)’을 받은 겁니다.

 김 실장 체제는 2013년 8월 초 출범했습니다. 그가 취임한 직후부터 ‘몰아내기’ 논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양건 감사원장과 채동욱 검찰총장 퇴진의 배후에 김 실장이 있다는 겁니다. 김진태 검찰총장의 임명과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의 사퇴에도 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도 나옵니다. 물론 김 실장은 관련 의혹을 모두 부인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진짜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국민과 언론, 정치권 일각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생각이 뭉쳐 ‘왕(王)실장 현상’이 생겨난 겁니다.

 김기춘 퇴진론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2014년 1월이었습니다. 신용카드 정보유출 파문 속에 당·정·청 쇄신론이 고개를 들면서 경제부총리뿐만 아니라 비서실장도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이후 세월호 참사와 십상시 논란 때도 퇴진론이 고개를 듭니다. 13개월 동안 정치권에서 비서실장 퇴진은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총리·장관을 바꾸어도 비서실장을 교체하지 않았으니까 국정쇄신이 아니라는 인식이 굳어졌습니다.

 조선시대 ‘왕의 실장’은 도승지(都承旨)였습니다. 왕명을 출납하던 승정원의 책임자입니다. 직급은 정3품, 지금으로 치면 장관도 아니고 차관급입니다. 왕 옆에 바짝 붙어 있다는 점을 이용해 정치에 개입하는 폐해를 경계하려는 직급 책정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도승지 나라’의 그림자가 조정 전반에 드리워진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정조 때 홍국영 정도가 예외지만 그는 경호실장 등 여러 감투를 겸직했기 때문에 단순한 도승지는 아니었습니다.

 ‘수퍼 도승지’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대통령, 최대 피해자는 결국 국가입니다. 왕실장의 입에서 대통령의 발언과 지시가 나올 때마다 언론은 그 진위를 따지고 의중을 의심합니다. 국회에선 불필요한 논쟁이 일어납니다. 국민은 칙칙한 색안경을 쓰고 대통령을 바라보게 됩니다. 부정적인 맥락효과가 벌어진다고 할까요. 온 사회의 역량을 모아도 지금의 난관을 풀기 힘든 판에 ‘왕실장’이 만들어내는 의심과 무력감은 정치를 비틀고 뒷걸음치게 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민주주의·공화라는 국가 핵심가치와 왕실장 사이에는 엄청난 위화감이 존재합니다. 실제 여부와 관계 없이 지난 1년여간의 논란은 정치·사회 진전의 걸림돌이 됐습니다. 신임 비서실장은 몸을 더 낮추고 귀를 더 열어야 합니다.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는 데 힘을 쏟아야 합니다. 입김·공작·개입이라는 단어가 비서실장의 연관어로 검색되지 않도록 처신해야 합니다. ‘도승지의 나라’ 구설(口舌)은 2014년, 2015년으로도 충분히 지겹습니다.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