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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아직도 지문 찍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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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논설위원

이번 이야기는 아주 사소(?)한 것이다. 시작은 공문 한 장이다. 지난해 10월 국가인권위원회는 금융위원회에 권고 공문을 보냈다. 공문엔 ‘금융회사가 수집한 지문 정보를 파기하라’고 적혀 있었다. 금융회사는 주민등록증 뒷면에 날인된 지문을 복사·보관하고 있는데 이게 개인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이유였다. 금융위는 권고를 따랐다. 각 금융협회에 지난달 말 ‘지도 공문’을 보냈다. ‘앞으로 지문 정보를 수집하지 말 것이며, 그간 모은 지문 정보도 5년 안에 없애라’고 했다. 말이 점잖아 ‘지도 공문’이지 어기면 신용정보법,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5년 이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고 했다. 금융위의 아무 생각 없는 조치가 몰고 온 파장은 컸다.

 은행들이 검토에 들어갔다. 간단치 않았다. 시중은행이 폐기해야 할 지문 정보만 28억건. 비용만 수천억원이다. 1분에 하나씩 지운다 치고 한 사람이 8시간씩 365일 1년 내내 일하면 1만5981년이 걸린다. 1만5981명이 달려들면 1년이면 되는 것 아니냐고? 그렇게라도 되면 좋으련만, 아니다. 보관 창고가 좁아 많은 인원 투입이 불가능하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꺼내 지우고 다시 넣어야 한다. 마이크로 필름부터 실물 서류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5년 내 폐기는 언감생심이다. 뒤늦게 현실을 알게 된 금융당국은 다음 달까지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절충안을 찾기로 했다.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여전히 금융회사들은 뒷목이 켕긴다. 장관 바뀌고 정권 바뀌면 언제 또 이걸 왜 안 했냐고 꼬투리 삼을지 모를 일이다.

 애꿎은 은행을 단단히 골탕먹인 주범이 누구일까. 원죄는 행정자치부에 있다. 애초 주민등록증에 왜 지문을 넣게 해서 이 난리를 치게 하냔 말이다. 이유부터 찾아봤다. 주민증에 지문을 넣은 것은 1968년 11월 21일이다. 주민등록법 24조 2항에 아예 ‘지문’을 넣도록 규정했다. 무장 공비가 청와대 인근을 난입하던 시절, 주민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거칠게 표현하면 50년 전 독재 시대의 잔재다. 백번 양보해 그 시절에야 병아리 눈곱만큼의 효용은 있었다고 치자. 인감증명 뗄 때도, 돈 빌릴 때도 지문을 대조했으니. 지금은 어떤가. 어디에도 쓸 데가 없다. 아니, 가끔 있긴 하다. 범죄에 악용·도용될 때다. 얼마 전에도 공무원이 야근수당 타려고 실리콘으로 지문을 만들어 대신 찍었다지 않은가. 쓸 데는 없고, 잃어버리면 골치 아프니 대개 주민증은 집에 놓고 운전면허증을 대신 갖고 다닌다.

 인권위도 한참 방향을 잘못 잡았다. 금융위에 지문 정보를 없애라고 하기 전에 행자부를 다그쳐 주민증의 지문 날인 폐지부터 권고해야 했다. 그게 반(反)인권을 바로잡는 순서다. 이번엔 행자부에 물어봤다. 관계자는 심드렁해 했다. “주민번호 체계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포괄적 검토를 하고 있다”는 상투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시기도 미정, 방향도 미정이란다. 주민증에 지문 날인만 먼저 없애면 어떻겠느냐고 되물었다. “법을 바꿔야 한다. 할 수 있으면 나도 좋겠다”는 영혼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다 신문에 칼럼을 쓰겠다니 반응이 왔다. 언제 게재되느냐고 묻는다. 비로소 그 관계자의 관심사항을 건드린 것이다. 하기야 장관님이 신문 보고 놀라시지 않도록 미리 알려둬야 할 터였다.

 대통령은 요즘 입만 열면 부처 간 협업과 규제 철폐를 외친다. 지문 날인 같은 건 협업거리도 안 되고, 규제 축에도 못 낀다. 부끄러워해야 할 봉건시대의 잔재다. 그런데도 그 말도 안 되는 잔재가 21세기까지 살아남아 금융 경쟁력을, 첨단 IT산업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이런 것 하나 못 없애면서 ‘불어터진 국수’ 운운하는 건 배부른 소리다. 당장 바꿀 수 있는 불합리, 낡은 관행, 규제부터 없애야 경제가 살고 국격이 올라간다. 나라 꼴이 괜히 우스워지는 게 아니다. 민심이 달리 사나워지는 게 아니다. 국론이 이유 없이 분열되는 게 아니다. ‘음식 끝에 의 상한다’는 말처럼, 사소(?)한 것 하나에 민심이 돌아서는 것이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