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니 TV가 소비자의 ‘로망’이었던 때가 있었다. 불과 10여 년 전 일이다. 소니뿐 아니라 아날로그 시절 일본 TV는 ‘믿고 사는 TV’의 대명사였다. 그랬던 일본 TV산업의 현주소는 지리멸렬이다. 최근 일본 기업들의 실적과 경영전략이 속속 발표되면서 들리는 TV 업체들의 소식은 거의 관 뚜껑에 못질하는 수준이다. 샤프·파나소닉·도시바 등 일본 대표 TV 업체들은 외국의 라인업에서 철수하고 일본 내수시장에 치중하겠다는 경영전략을 발표했다. 소니는 이미 지난해 TV 부문을 분사해 매각 초읽기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일본 TV의 세계시장 점유율(20%)은 중국(23%)에도 밀려 3위로 추락했다.
일본 TV의 위기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3년 전 샤프가 대만에 최대주주 자리를 내주고, 일본 TV 업체들이 엄청난 순손실을 기록하며 이미 몰락을 예고했다. 재기의 시도도 있었다. 소니를 필두로 초초고화질 4K UHD TV로 승부수를 던졌다. 기존 초고화질(UHD) TV가 진짜처럼 생생한 화면(Seeing real)을 보여준다면 4K TV는 실제 그 현장에 있는 것과 같은(Being real) 해상도를 실현한다.
문제는 이런 해상도를 구현하는 콘텐트가 나오기도 전에 기술은 금세 따라잡혔고, 중국 업체들은 4K TV를 풀HD TV 가격 수준으로 시장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혁신이 아닌 기술 개선 정도로는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긴 채 재기의 몸부림은 실패했다. 아날로그 자산에 대한 미련 때문에 디지털로 빠르게 전환하지 못했던 일본 TV는 아널드 토인비가 경고했던 ‘승리의 기억’에 안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교훈의 사례만 하나 더 보탰다.
한데 일본을 보며 뒷골이 당기는 것은 이런 토인비적 교훈이 아니다. 창조자가 아닌 팔로어로 승리한 자의 한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게 무섭다. 산업을 창조하는 미국은 제조업에서 일본·한국 등 팔로어에 고전하면서도 여전히 전혀 새로운 혁신 상품으로 시장 트렌드를 선도하는 반면, 팔로어로 성공했던 일본은 패러다임이 변하면서 맥을 못춘다. 지금 한국 TV 산업은 세계 1등이다. 한데 인터넷과 OS만 있으면 화면이 있는 모든 기기가 TV화하는 혁신의 시대에 우리 기업들도 팔로어 산업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시험에 들었다.
또 주목할 건 내부 경쟁에 힘쓰느라 글로벌 시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일본 산업의 ‘속 좁음’이다. 소니는 평면 브라운관 TV ‘베가’의 엄청난 성공에 도취돼 디지털로 이행하지 못했고, 삼성과 공동 설립했던 S-LCD가 적자를 내자 곧장 지분 전량을 매각했다. 파나소닉은 자신들이 개발한 PDP TV만 고집했고, LCD의 원조였던 샤프는 LCD 패널을 자기 TV에만 적용하며 갈라파고스화를 자초했다. 시장을 키우는 확장 전략이 아니라 나만 살겠다는 폐쇄 전략으로 일본 TV산업은 공멸로 갔다. 일본 내 경쟁 기업만 제치면 세계시장의 승자가 될 거라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뒤엔 한국이 버티고 있었는데 말이다.
혁신과 확장성에서 한국 기업은 일본 기업보다 더 나아야 한다. 한데 요즘 독일 가전전시회 삼성 세탁기 파손 사건과 관련된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유치찬란한 싸움을 보고 있노라면 일본 기업이 했던 속 좁은 행보를 보는 듯해 불안하다. 독일 전시회장에서 LG전자 사장이 삼성 세탁기 문을 파손하고, 삼성의 고소로 LG 관계자들이 기소되고, LG 측은 이 광경을 편집한 동영상을 공개하는 등 이전투구를 벌인다. 이를 외국 언론들은 흥미롭게 보도하고 있다. 세계 전자산업의 선두인 두 기업의 저열한 싸움은 한국 전자산업을 ‘디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한데 두 기업이 싸워 승리한다고 세계시장의 승자가 되라는 보장은 없다. 바로 뒤에는 치열하게 올라오는 중국이 있다. 한국 기업들이 일본 TV의 몰락에서 배우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