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양복 남성패션의 양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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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사' 간판을 달고 돈 깨나 있는 멋쟁이들만 모셨던 맞춤양복점. 남성패션의 명가(名家)로 한 시대를 풍미하다 기억의 저편으로 퇴출됐던 추억의 양복점이 부활하고 있다. 휴고 보스.아르마니.제니아 등 내로라 하는 이탈리아 명품 뺨치는 스타일, 부담 쏙 뺀 가격, 철저한 서비스…. 품격에 고객우선 마인드로 무장하니 입소문 타고 솔솔 단골이 늘고 있다. 어떤 곳일까. 이름도 생경한 그러스터커를 찾아보았다.
"허리는 잘록하게 들어가고 바지통은 좀 넓었으면 좋겠어요. 원단은 음…, 요즘 유행하는 회색 광택 소재면 어떨까요?"
지난 9일 일산서구 대화동에 자리한 맞춤양복점 '그러스터커(대표 홍순신)'를 찾은 회사원 남종경(32)씨. 샘플북을 펴 들고 원하는 옷감을 고르는가 하면 입고 싶은 디자인을 패션잡지에서 아예 오려와 내민다. 묻는 형식을 취했지만 원하는 스타일을 주문하는 솜씨가 여간 깐깐하지 않다. 곁에서 남씨의 주문에 꼼꼼히 응수하는 이 또한 만만찮다. '양복쟁이' 20년 경력의 윤종수씨다. 이런 건설적인 실랑이가 충분히 오가야 고객 마음에 꼭 드는 양복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줄자로 남씨의 사이즈를 재면서도 설전은 멈추지 않는다.
레디-메이드, 이른바 기성복에 싫증난 이들이 그러스터커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옷에 몸이 아닌, 몸에 옷을 맞추기 위한 남성들의 '반란'인가.
안드레아 바냐.오델로 등 서울 압구정을 중심으로 붐을 일으킨 브랜드를 맞춤양복 1진으로 친다면 그러스터커는 2진 쯤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다. 그만큼 차별화된 전략과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자신감이다.
우선, 숨어 있는 양복 전문가들의 영입을 꼽을 수 있다. 그러스터커엔 20년 이상 경력의 전문가를 매장마다 3명씩 배치하고 있다. 한때 잘 나가다 기성복의 흐름에 밀려 퇴출된 설움(?) 많은 장인들을 매장으로 불러들인 것은 홍순신 사장의 아이디어다.
"전문가들이 많이 묻혀 있습니다. 장인들의 아까운 솜씨도 살리고 실속파 멋쟁이들은 명품 스타일의 옷을 싸게 해 입을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지요. 맞춤양복의 붐이 일기 시작한 건 서울의 압구정이지만, 품질과 서비스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건 그러스터커라고 자부합니다." 홍 사장의 말에 자신감이 배어 있다.
홍 사장은 이들을 제 1선에 배치, 고객상담의 전 과정을 맡겼다. 원단.양복선.주머니 모양.트임 모양 등 고객의 요구를 오롯이 새기고 이탈리아 명품 감각의 스타일을 제안하니 만족도는 자연스레 높아졌다. 여직원이 치수 잴 때의 불편함이 없어 좋다고 대놓고 말하는 단골이 있을 정도다.
그러스터커는 타 브랜드와 달리 직영체제를 고집한다. 본사의 이익을 줄이는 대신 질 좋은 원단을 써서 고객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전략이다. 이탈리아에서 직수입한 150수 순모 원단으로 양복 한 벌 맞추는데 39만원이면 된다. 19만원, 29만원대의 실속주문도 많다. 겨울코트도 25만 ̄49만원이면 최고급으로 맞출 수 있다.
그러스터커의 맞춤양복은 멋쟁이 뿐 아니라 '기성복 알레르기'가 심한 대형(?) 고객들에게도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보통 타 브랜드에서 허리 40인치 이상이면 적용하는 원단 추가비용이 없다. 벌써 입소문이 돌았는지 42~45인치 나가는 '큰 손님'들이 한 달이면 10명 이상 찾는다. 어깨 처짐으로 팔이 짝짝이인 특수체형도 '그러스터커'에서라면 만사형통이다.
전문가가 체크한 꼼꼼한 데이타, 고급 원단, 그리고 분업화된 운영시스템. 삼박자가 딱딱 들어맞은 덕에 '그러스터커'는 대화동 매장에 문을 연 지 한 달 만에 1백 여명의 단골이 생겼다.
그러스터커는 옷 한 번 맞추면 닳고 싫증 나서 못 입을 때까지 A/S해 준다. '처음 사랑 끝까지' 가겠다는 전략인 셈. 이 때문인지 '그러스터커' 양복이 아닌데도 수선을 의뢰하는 고객들도 꽤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달부터 매장에 아예 수선실을 따로 마련했다.
'그러스터커' 매장을 처음 찾는 이들은 카페에 온 듯 고풍스런 인테리어에 깜짝 놀란다. 맞춤양복에 대한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잘 빠진 양복과 와이셔츠, 컬러풀한 넥타이 등을 보며 다시 한 번 놀란다.
나만의 개성을 살린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옷. 나는 나, 남들과 다르고 싶다는 개성파들에겐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유행을 빨리 캐치하고 선도해 나간다는 뜻의 패션용어 그러스 허퍼(Grasshopper)와 주름을 잡는다는 뜻의 터커(Tucker)를 합성한 '그러스터커'는 맞춤양복업계 '지존'을 꿈꾸는 홍 사장의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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