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전후 70주년을 맞아 8월쯤 발표할 예정인 ‘아베 담화’에 대한 전문가 회의가 25일 시작됐다. 아베 총리는 ‘미래 지향’의 논점을 제시하며 초안 작업을 주문했다. 전문가 회의가 아베의 명분 쌓기에 그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인정하고 사죄한 자신의 ‘무라야마 담화(1995년)’의 핵심 단어들이 빠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학계와 재계 인사, 언론인 등 16명으로 구성된 ‘21세기 구상 간담회’ 첫 회의는 총리 관저에서 열렸다. 니시무로 다이조(西室泰三·80) 닛폰유세이(日本郵政) 사장이 간담회 좌장을,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67) 국제대학 학장이 좌장 대리를 각각 맡았다. 앞으로 월 1회 정도 회의를 갖고 의견들을 종합할 계획이다.
아베 총리는 "미래는 과거와 단절될 수 없다”며 “전쟁에 대한 반성과 전후 70년 평화 국가로서의 발자취, 그 위에 앞으로 80년, 90년, 100년이 있다”고 말했다. 전후 70년 일본의 행보를 어떻게 평가하고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 한국·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 등과 어떤 화해의 길을 걸어왔는지, 21세기 아시아와 세계의 비전을 어떻게 그릴 것이며, 또 일본은 어떤 공헌을 해야 할지 등 5개 논점도 제시했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2013년 4월 참의원 예산 위원회에서 "아베 내각이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계승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키는 등 역대 총리들의 담화 계승에 줄곧 부정적인 견해를 밝혀왔다. 무라야마 담화를 ‘전체적으로 이어받겠다’는 표현을 쓰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 ‘통절한 반성’ ‘사죄’ 등 과거 담화의 핵심 단어들을 바꿀 가능성도 내비쳤다. 이 때문에 연립 공명당은 물론 자민당 내부에서조차 사전 협의를 요구하고 있지만 아베 총리와 측근들은 부정적이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25일 NHK와의 인터뷰에서 “(담화의) 표현에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담화에 담긴) 사고 방식은 바꾸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무라야마 담화의 핵심 단어들이 아베 담화에 포함돼야 한다는 뜻도 밝혔다. 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 자민당 부총재도 기자들을 만나 “50주년, 60주년 담화를 계승하는 것이 명쾌하면 명쾌할수록 국가의 기본 방향에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진다”고 말했다. 에다 겐지(江田憲司) 유신당 대표는 “무라야마 담화와 고이즈미 담화를 아베 총리도 계승하겠다고 한다면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깊은 반성과 사죄는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요미우리신문은 26일 “한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동맹국 미국도 (아베) 담화의 행방을 주시하고 있다”며 “외교적인 압력이 가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일본과 한국·중국의 갈등이 커지는 것이 동북아 안전 보장에 마이너스라는 신호를 꾸준히 보내왔다. 신문은 “아베 정권이 과거 담화의 역사 인식에 관한 문구를 이어받도록 미국이 물밑에서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미국이 요구하는 벽은 높다”며 “새로운 담화에서 과거 담화의 중요 부분을 빼기 어려울지 모른다”고 말했다.
도쿄=이정헌 특파원 jhleehop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