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칼럼] 저유가의 명과 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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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호 31면

우리는 요즘 보기 드문 저유가 시대에 살고 있다. 최근 국제유가가 약간 반등하고 있지만 여전히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언론들은 국제유가 하락에 따른 영향에 대해 대서특필하고 있다. 미국 서부텍사스유(WTI)의 가격은 배럴당 47달러대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이는 1976년의 가격과 비슷한 수준이다.

국제유가 하락의 배경에는 셰일석유·가스 개발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유가정책이 있다. 북미 지역에서의 셰일석유·가스 개발은 기존 산유국에 정치·경제적으로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미국 등의 석유 자급도가 높아지고 석유수출국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맞물려 거대 산유국인 사우디는 셰일석유·가스 업체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의 패권을 넘겨주지 않기 위한 싸움이다. 경제논리상 국제유가가 하락하면 감산을 통해 가격을 올려야 채산성을 확보할 수 있는데 사우디는 감산에 나서지 않고 있다. 자본이 풍부해 버틸 수 있는 여력이 충분하다는 판단에서다. 오히려 사우디는 국제유가를 더욱 떨어뜨려 자본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셰일석유·가스 업체들에 타격을 주기 위한 전략을 쓰고 있다. 셰일석유·가스 업계 일각에서는 배럴당 40달러까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대략 60달러 선을 손익분기점의 마지노선으로 보고 있다. 결국 에너지 패권을 둘러싼 다툼이 저유가의 또 다른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로 인해 소비자는 적지 않은 이익을 보고 있다. 당장 설을 맞아 자신의 차량을 이용해 고향을 찾았던 사람들은 예전에 비해 떨어진 유가로 부담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차량 구입 패턴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미국의 경우 올 1월 연료를 많이 소비하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판매가 전년에 비해 크게 늘었다. 대형 SUV와 고급 SUV의 판매는 각각 74.3%, 33.4%나 증가했다.

기업에도 유가 하락은 희소식이다. 예를 들면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2013년 1억400만 달러의 순손실을 봤지만 지난해에는 5700만 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항공유 가격 하락 덕분이며 올해도 유사한 혜택을 볼 것이라고 전망했다.
석유 자원을 빨리 고갈시켜야 환경오염과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현상은 고무적이다. 이들은 석유가 부족하게 되면 유가가 올라 각국이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신재생 에너지 개발에 더욱 힘을 쏟는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신재생 에너지 산업이 활성화되면 기존의 에너지 부국과 빈국 간 갈등도 줄어든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에는 모순이 있다. 화석연료가 이들의 기대처럼 빨리 고갈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셰일석유·가스에서 보듯 예전에는 가격 경쟁력이 약했던 화석연료들이 유가가 올라갈수록 인기를 끌고 이에 대한 개발이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각국이 태양광·풍력·수력 등을 더욱 적극적으로 개발하겠지만 신재생 에너지의 가격 경쟁력 확보는 아직 쉽지 않은 상황이다. 오히려 기술과 자본이 부족한 저개발 국가들의 경우 화석연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에너지 빈부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처럼 에너지가 우리에게 던지는 난제는 적지 않다.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국가나 기업들이 저유가를 소비자 입장처럼 마냥 기뻐할 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다. 에너지 문제는 지구촌 경제와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이슈다. 국제적 컨센서스 도출을 위한 노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버틸 피터슨
코리아중앙데일리 경제에디터. 보스턴글로브 등 미국의 주요 신문사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이집트 미국상공회의소가 발간하는 ‘월간 비즈니스’ 편집장을 지냈고 현재 코리아중앙데일리 경제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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