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눈 같은 '액체렌즈' 만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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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전기 공급 방법에 따라 하나의 액체를 볼록렌즈 또는 오목렌즈로 변환할 수 있다.

카메라로 멀리 있는 사람을 찍기 위해 줌 기능을 사용한다. 거기에는 많게는 10여 개, 적게는 서너 개의 렌즈가 들어가 있다. 렌즈를 당기고 늘리기 위해서는 모터가 있어야 한다. 렌즈 자체가 유리로 되어 있어 한 번 카메라에 장착된 렌즈는 그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 즉, 오목렌즈가 볼록렌즈로 또는 그 두께가 바뀌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렌즈를 여러 개 조합해 초점 거리를 맞추기 위해 모터 등이 필요했던 것이다.

앞으로 수년 이내에 고체 유리렌즈의 상당부분이 물과 기름 등 액체로 만든 렌즈로 대체될지 모른다. 액체렌즈에 대한 특허가 2000년대 들어 급증하고 있으며, 필립스.삼성전기 등 주요 기업들이 이와 관련해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액체렌즈 관련 특허의 경우 2000년까지 모두 29건에 불과했으나, 최근 5년 동안 38건이 출원됐다. 렌즈 혁명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액체렌즈에 불을 댕긴 것은 필립스와 삼성전기가 지난해 독일 정보통신 박람회 '세빗(CeBIT)'에 액체렌즈와 카메라용 모듈을 개발해 공개하면서다. 필립스 액체렌즈의 경우 지름 3㎜, 두께 2.2㎜에 불과하다. 삼성전기는 카메라휴대전화용 모듈을 개발해 주요 업체의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에는 액체렌즈를 이용해 휴대전화, 컴퓨터 등 각종 휴대용 단말기의 표시화면용으로 활용하는 기술도 속속 개발되고 있다.

액체렌즈의 원리는 이렇다. 렌즈 역할을 하는 큰 물방울이 금속 또는 전극판 위에 있다고 치자. 물방울이 판 위에 넓게 퍼져 있으면 렌즈의 두께가 얇아져 초점 거리가 길어지고, 물방울이 동그랗게 몰려 있으면 두꺼운 볼록렌즈 형태가 돼 초점 거리가 짧아진다. 이런 물방울 원리를 이용하는 것이 액체렌즈다. 액체렌즈는 그 두께를 전기로 조절한다.

전기의 +,-의 극성과 전기량, 렌즈로 사용할 액체인 물과 기름층을 어떻게 만들어 놓느냐에 따라 전기 공급만으로 볼록 또는 오목렌즈로 자유롭게 변하게 할 수 있다.

필립스에서 개발한 액체렌즈右와 이를 회로에 연결해 구동하도록 만든 부품.

렌즈의 두께 조절 역시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기존 카메라처럼 초점 거리를 맞추기 위해 모터를 이용해 렌즈를 길게 늘이거나 당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치 사람의 눈과 같은 카메라 렌즈가 나오는 것이다. 사람의 눈 수정체 두께가 원근 거리에 따라 자동으로 조절되듯 액체렌즈도 그렇게 전기로 조절할 수 있다. 모터를 작동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전기도 극소량만 필요하다. 렌즈 자체가 액체이기 때문에 마모되지도 않아 100만 번 이상 사용할 수 있으며, 초점도 100만 분의 몇 초 이내 짧은 시간에 맞춰진다.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연구팀은 올해 초 두께 8㎜의 줌 렌즈를 액체렌즈로 개발해 선보이기도 했다. 또한 액체렌즈는 기존 평면화면보다 더 훨씬 밝은 화면을 개발하는 데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빛의 손실이 거의 없는 데다 염료가 섞인 기름층만 잘 조절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미 청록색.노란색.검은색 등을 이용한 실험에 성공했다.

액체 수은을 이용한 지름 6m짜리 천체망원경. 거울면처럼 사람과 철골 지지대가 비친다.

특허청 정밀기계담당관실 경천수 사무관은 "액체렌즈가 실용화되면 기존 렌즈의 단점이었던 모터가 필요 없고 소형화가 가능해 카메라.내시경 등 다양한 분야에 파급 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액체렌즈는 초대형 천체망원경 개발에도 응용되고 있다. 미국 브리티시 콜롬비아대(UBC)는 지름 6m짜리 초대형 천체망원경을 액체 수은으로 만들어 지난해 가동에 들어갔다. 액체 수은을 커다란 투명 원통에 담은 뒤 분당 5회 정도 회전하게 함으로써 원심력에 의해 중심 부분이 움푹 들어가도록 해 천체망원경용 렌즈로 사용하는 것이다. 소형 카메라용 액체렌즈가 전기로 그 두께를 조절한다면 천체망원경용은 원심력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천문학자 이동욱 박사는 "지름 6m짜리를 기존 방식처럼 유리로 제작한다면 1억 달러가량이 들지만 액체 수은을 이용함으로써 10억원 정도로 제작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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