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 구동존이가 필요하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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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외교안보 멘토로 활동해온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 전 태국대사가 지난해 10월 말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언론과 정계에서는 아베 총리 개인에 대한 불신이 워낙 큰 나머지 그의 브레인 중에도 비슷한 성향의 인물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보수우익적이거나 한국과의 대립을 불사하려는 인사가 많이 포진해 있을 거라는 선입견이 있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측근들 가운데는 의외로 일본의 국가 이익 구현을 위해 한국과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 적지 않다. 오카자키 대사도 한국을 깊이 이해하려 했고, 돈독한 양국 관계 구축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한 인물이었다.

그는 도쿄대 법학부 출신의 초임 외교관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오카자키 대사는 한국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1970년대 말 ‘이웃 국가에서 생각한 것’이라는 장문의 칼럼을 일본 저널에 기고한 바 있다. 이 칼럼에서 그는 한국이 장구한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가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 학계나 언론에서 한국에 관한 진지한 연구나 관심이 없음을 개탄했다. 예컨대 그가 보기에 안중근 의사는 조선의 교양 있는 애국자였고, 굳이 일본과 비교한다면 메이지유신을 견인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같은 지사들에 비견되는 일류의 위인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한국 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일본 내에서 한국에 대한 무지와 편견 속에서 반한 감정이 만연하는 현상에 대해 경계했다. 그러한 한국을 강제적으로 병합한 것은 일본이 아무리 좋은 외교를 한다 해도 씻을 수 없는 원죄라고 자성했고, 그래서 일본으로서는 한국이 경제 발전을 이룩하도록 지원해야 하고, 그것이 일본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 길이라고 제언했다.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 전 도쿄대 법학부 교수는 오카자키 대사의 이 칼럼을 학생들의 필독 자료로 선정했다. 그도 한·일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아베 총리의 핵심 브레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기타오카 교수는 2002년 시작된 제1차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 멤버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이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고, 보통 국가로서의 외교 정책을 전개하기 위해서도 한·일 관계 긴밀화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아베 정부는 2013년 12월 처음으로 공표한 ‘국가안보전략서’와 ‘방위계획대강’에서 일본이 추구해야 할 외교안보 정책의 과제로서 미·일 동맹 강화와 더불어 한국과의 안보 협력 강화를 중요 우선순위로 제기했다. 이는 기타오카 교수를 포함한 아베 측근들의 전략적인 대한 정책론이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라는 외교전략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일까. 목표는 바람직했지만 일본 지도층이 한국 정부와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소프트파워 외교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점에서 일본 측은 중국 정부가 어떻게 한국에 접근하고 있는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한국과 중국 사이에도 풀리지 못한 역사와 영유권 갈등 문제가 내재돼 있다.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 고구려 역사에 대한 해석 차이, 이어도를 둘러싼 중국 측 주장 등은 언제라도 한·중 간에 갈등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한국과의 갈등 사안을 회피하면서 안중근 기념관 건립 등 한국 정부와 국민의 마음에 호소하는 카드를 사용하고 있다. 쟁점들은 당분간 보류해 두고, 당면의 공동 이익을 우선 추구하는 중국의 ‘구동존이(求同存異)’적 외교가 한국 지도층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일본 지도자들도 제국주의 침략으로 야기된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양식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베 총리는 지난 12일 일본 의회에서 행한 시정방침연설에서 그간 일본이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을 하고 자유민주국가를 건설해 왔다고 밝히면서, 향후에도 세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러한 ‘전쟁에 대한 반성’과 ‘세계 평화에 대한 강한 의지’는 구체적인 외교 정책으로 표현돼야 할 것이다. 역사 현안이나 영유권에 대한 무리한 주장을 삼가고, 전쟁으로 피해를 봤던 아시아 민족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외교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오카자키 대사는 한국과 일본 간에 우호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지 여부가 일본에 있어‘국가의 백년대계’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잖아도 휘발성 강한 양국 간 현안들이 잠복해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일본 지도층은 오카자키의 유언과도 같은 경구를 깊이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박영준 일본 도쿄대 국제정치학 박사. 미국 하버드대 US-Japan 프로그램 방문학자. 주요 저서로는 '해군의 탄생과 근대 일본' '제3의 일본' 등.

박영준 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