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 기자의 뒤적뒤적] 파란 눈의 시아버지는 요리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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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싹수없는 며느리 vs 파란 눈의 시아버지
전희원 지음, 김혜진 그림, 모티브북

알콩달콩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신랑각시가 깨소금 볶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 유대계 캐나다 총각과 사랑에 빠져, 런던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캐나다 퀘벡에서 시집살이를 하는 씩씩한 '갑순이'가 쓴 부엌 쟁탈기입니다.

맞수는 알제리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거쳐 캐나다에 자리 잡은 교사 출신 시아버지. 세계 각국의 요리책을 섭렵한 요리광으로 한국인 며느리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치려 들 정도입니다. 아내를 제쳐 놓고 30년 넘게 주방을 독점한 채 외식 금지, 저녁 7시 반 이후 야식 금지 등 강요하는 '먹거리 독재자'이기도 하죠.

지은이는 한국판 잔다르크입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김치와 불고기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고는 우제알(우리 먹거리 제대로 알리기 운동본부) 본부장을 자처합니다.

시아버지는 한국 즉석라면을 파스타처럼 오래 삶아 '우둥퉁 내 너구리'로 만들고, 익어가는 김치를 썩었다며 내버리고, 밥을 하는 며느리 앞에서 '쌀은 왜 씻느냐' '밥솥 물에 손은 왜 넣느냐'고 타박합니다. 며느리 역시 만만찮습니다. 한국식 오징어 튀김을 하려는데 시아버지가 아깝다고 기름을 주지 않자 앞치마를 팽개치는 시위를 하고, 포옹하는 풍습이 내키지 않아 김치를 먹은 뒤 시아버지와 뽀뽀하고, 금보다 비싸다는 향료 샤프란을 몰래 훔쳐내는 등 잔머리 대가고 게릴라전 명수입니다.

그렇다고 조마조마하지는 않습니다. 배꼽 잡습니다. 처음 맛본 고추장이 매콤달콤하다며 반 공기나 퍼먹고는 화장실을 들락날락한 뒤 "먹을 때도 맵지만 나갈(?) 때는 더 매운 신기한 음식이야"라는 남편이 우군입니다. "옛날 스페인에선 낮잠 깨우는 사람을 죽여도 정당방위로 간주됐다"고 위협해 며느리 낮잠을 재우는 가족들은 어떤지요. 시아버지에게 배운 스페인 요리로 이웃들을 감동시킨 뒤 고마워하는 며느리에게 "그게 워낙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 맛없기가 힘들다"고 열받게 만드는 시아버지도 미워할 수 없습니다. 며느리가 방귀를 뀌자 "꼬꼬(애완견)야, 뭘 잘못 먹었니?"라고 눙치는 배려도 하거든요.

외식을 하고 맛있다 칭찬하는 것은 '호적에서 이름을 파가겠다'고 용쓰는 걸로 해석하는 시아버지와 티격태격하며 정들어 가는 모습을 그린 이 책은 문화 충돌, 시집살이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책 말미에 덤으로 시아버지가 개발해 꼭꼭 숨겨놨다는 요리법을 붙인 걸 보면 역시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란 옛말이 그른 건 아닌 모양입니다.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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