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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안겨준 「현의 마술」-정경화 바이얼린 독주회를 듣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직업시간과 여가시간이라는 말이 있을수 있다면 나에게 있어서 음악회에 가는 시간은 직업시간의 연장이다. 언제나 그러한 것이지만 이 직업시간은 나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음악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는다기보다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시간이 이 직업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30일밤 나에게 희한한 일이 하나 벌어졌다. 정경화씨가 베푸는 음악회가 나에게 있어서 한없이 즐거운 여가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피아노의 「슈나벨」이나 바이얼린의 「하이페츠」같은 사람의 연주를 내가 어렸을 때 음반을 통해서 들었을 적에는 그 시간이 나에게 있어서 직업시간이 아니고 하나의 여가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나에게 무한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잘하고 못하고를 놓고 따질 수는 절대 없고, 그들의 연주수준은 문자그대로 너무나 월등하기 때문에 나는 나의 몸을 그들의 음악세계에 완전히 맡겨놓고 편안히 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내 어린시절의 여가시간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데 정경화의 연주가 바로 그러한 나의 여가시간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평가의 대상이 아니고 감상의 대상이 되는 음악을 정말로 오랜만에 들어본 느낌이다.
한국사람의 연주언어는 언제고 외국어류에 속하고 있다.
외국어에 아무리 능숙하다고 해도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외국어 이상의 것이 아닐 경우는 그 외국어로 시를 쓸 수는 없다.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시를 쓴다는 것은 언어구사력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경화의 경우 그가 비록 서양음악을 다루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음악적 발음은 눈을 감고 들으면 자국인인지 타국인인지 알 수가 없다. 그만큼 그는 완벽한 연주를 하고 있다.
말을 한다고 그것이 모두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입신의 경지에 들었다는 바둑의 고수가 두는 바둑수의 한수 한수 같이 정경화가 하는 말은 언제나 형상화된 말이 되고 그 말의 의지나 의미가 무한히 깊고도 다양하다. 큰소리가 음악적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라는 교훈을 남기고 싶었던지 그는 음량의 조절에 특히 마음을 쓰는 듯 했다.
조용하게 이야기해도 그이야기의 내용이 뜻있고 확실하면 된다. 공허한 내용을 큰 소리로 설득시키려 해보았댔자 아무소용이 없다. 정경화의 경우는 음량이나 음길이의 조절내지 사용법이 경제적이고, 음악이 원하는 것 이상의 크기나 길이는 절대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런대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모두 다하고 있었다. 그 자그마한 바이얼린 하나에서 어떻게 그런 다양하고 의미심장한 소리들이 빠져 나오는가 싶었고 그래서 다만 경탄하는 마음뿐이었다.
현의 마술사라는 평을 외지에서 듣고 있는 이유가 헛된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정경화는 지금 한국인만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있는 어느곳의 사람이나 모두를 즐겁게 하고 있다. 그래서 정말 우리의 자랑이 저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음악을 들으면서 했다.
작곡에도, 피아노에도, 그리고 모든 다른 연주매체분야에 있어서도 정경화나 김영욱 같은 대가가 더 나와 주었으면 싶다. 그렇게되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더 자랑스럽겠는가 말이다.
거의 20년전, 그러니까 1966년9월15일자 한국일보에 필자는 정경화를 두고 이렇게 쓴일이 있다. 「…제대로 뻗을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 준다면 내 앞에 앉은 저 이름 모를 소녀도 앞날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우리민족의 타고난 음악성에 믿음이 갔다….』필자의 예언대로 정경화는 음악으로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5번의 앙코르에 순순히 응하는 것을 보니 조국의 청중이 그렇게도 좋았던 모양이다.
이강숙 <서울대·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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