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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0)한일회담(4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한일수뇌회담에 배석했던 당시 김용직주일공사의 증언으로는「호랑이논쟁」내막이 그후 타임지와 한일 언론에 보도된 것과는 거리가 있다 하나 아뭏든 당시 이 호랑이 논쟁은 세간에 상당한 흥미를 끌었다.
그래서 동경유엔군사령부의 미군과 주일미대사관쪽에서는 우리 대표부 사람들에게 왜 그 토록 호랑이문제가 흥미와 관심을 끌고 있느냐는 질문을 해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 외교관들이 일본말로「호」라고 할 때는「호랑이 새끼를 빼앗겼다」로서가 아니라「곁에 두고 애지중지하던 것을 빼앗겼다」는 뜻으로 쓰기 때문에 호랑이 논쟁이 은유하는 함축으로 재미있어하는 것 같다고 설명해 줬다는 얘기를 들었다.
호랑이 얘기에는 일본사람들이 임신란때나 일제 식민통치중에 우리 것을 모두 가져가 버려 남은 것이 없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는 얘기다.
아뭏든 평화선 선포와 그후 한일간의 분위기는 우선 이 정도로 다루고 다시 1차본회담의 전반적인 결과를 더듬어볼까 한다.
우리측이 예비회담에서 제의했던 회담의재 확대문제는 미측의 지침도 있고해 양측은 11월 28일의 제9차 예비회담에서△한일기본관계 수립△재산및청구권문제 해결△통상항해조약체결△어업협정 체결△한일간 해저전선분할△기타등 6개항의 의제를 추가, 확대키로 하는데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는 역시 일본측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통사정으로 52년2월중에 개시하기로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한일기본관계 수립등 양국간의 제반 현안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한 제1차 한일본회담이 52년2윌l5일 가까스로 그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첫날 회담분위기는 불과 한달전에 선포된 평화선때문에 바깥날씨 만큼이나 차갑고 냉랭했다.
양쪽은 우선 기왕에 합의된 의제의 협의방법을 논의한 끝에 일단 기본관계위원회②청구 권위원회③어업위원회의 3개위원회를 설치키로하고 나머지 통상·항해및 해저전선 분할문제협의는 뒤로 미루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순조로왔으나 각분과의 토의가 진행되면서부터 양국간의 기본방향에 대한 현격한 견해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당장 기본관계위원회에서 협의해야할 문제를 놓고 양측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일본측이 기본관계위원회의 설치 목적에 대해「양국의 새로운 관계발생에서 비롯되는 각 종 현안문제의 해결」이라는 견해를 주장한 반면 우리는「새로운 관계수립을 위한 과거부터의 현안문제해결」이어야 한다고 맞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측이「장래를 위한우호조약쳬결」에 근본목적을 둔반면 한국측은「과거를 청산키 위한 실질적평화조약」을 체결하자는데 그 취지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측은「과거를 보상하라」는 입장인데, 일본측은「과거를 묻지말라」는 자세였다.
이처럼 양측의 접근방식이 두드러지게 다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것이 청구권등 양
국의 이해가 걸린 문제와도 상호 연관성을 갖고 있기때문이었다.
때문에 일본측은 그들이 제시한 기본관계조약 초안에서 우선 명칭부터 「일한우호조약」이라는 이름을 내걸어△조약체결과 함께 외교 내지 영사관계를 수립하고△양국간의 무역·해운·통상에 있어 우호적 기반에서 최혜국민대우를 부여한다는 식으로 과거식민통치하에서 우리에게 끼친 정신적·물질적 피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않았다.
이러한 일본의 『한강에 배 지나간 흔적이 어디에 남아있느냐』는 식의 태도는 우리측이 제시한 기본관계조약에 대한 반응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우리측은 기본조약 3조에「한일양국은 1910년 8월22일 이전에 체결된 양국간의 모든 조약이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명문규정을 두었는데, 이에대해 일본측은『굳이 그런 조항을 둘 필요가 있느냐』고 이의를 제기해온 것이다.
일본측의 이러한 「과거를 묻지말라」는 식의 태도는 그뒤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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