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리 칼럼] 누구를 위한 9시 등교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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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호 30면

아주 오랜만에 집 정리를 하다 9년 전 육아일기 몇 권을 우연히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면 매일 아침 딱 한 시간 동안 아이를 봐주러 오던 대학생 시터가 쓴 일종의 근무 일지였다.

‘7월 20일 깨더니 엄마를 찾으며 한참을 울었어요. 8월 21일 8시15분쯤 깼고요, 네, 울었죠. 9월 6일 오늘은 좀 많이 울었어요. 10월 23일 엄마를 정말 그리워했어요….’

당시 우리 집에는 출근 시간은 빠르고 퇴근은 늦은 맞벌이 부부의 외아들을 봐주기 위해 많게는 하루 세 명이 드나들었다. 남편이 출근 후 내가 집을 나서는 오전 7시40분부터 유치원 스쿨버스가 집 앞에 오는 오전 8시40분까지 근무하는 놀이 시터,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오후 1시30분부터 애 아빠가 퇴근하는 오후 8시 무렵까지 일하는 베이비 시터, 그리고 청소나 빨래 등 베이비 시터가 절대 해주지 않는 집안 일을 해주러 일주일에 한두 번 낮에 오는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 이렇게 세 사람 말이다.

갑자기 그만둔 입주 아주머니를 대신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다 나름 짜낸 묘안이었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낯선 이에게 아이를 맡겨야 하는 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낮 시간에 애만 봐줄 사람 구하기는 쉬운 편이었다. 문제는 아침이었다. 딱 한 시간. 그때 한 시간의 여유만 있었더라도 아이가 낯선 대학생 누나 얼굴을 보며 일어날 일도, 엄마가 그립다며 깨자마자 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귀한 한 시간을 도저히 낼 수가 없었다. 당시 업무를 일찍 시작해야 하는 증권 담당기자라 출근을 늦출 수는 없고, 그렇다고 다섯 살 먹은 아이보고 혼자 밥 챙겨 먹고 시간 맞춰 스쿨버스 타고 유치원에 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전업주부들이 낮에 두어 시간 낼 필요가 있을 때 쓴다는 한 시터 전문업체의 놀이 시터를 매일 아침 무한정 쓰기로 했다. 한 번 이용에 두 시간이 기본이라 매일 아침 한 시간을 쓰면서 두 시간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두 배로 내는 돈도 돈이지만 시터가 10~20분 늦게 오기라도 하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시계만 보며 초조하게 기다리다 벨 소리가 나기 무섭게 뛰쳐나갔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늦게 나갈 때마다 회사에선 꼭 죄인 같은 심정이었다.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여자 후배들 상황을 비교적 잘 이해해 주던 한 남자 선배조차 “사람 여럿 쓴다고 하면 돈 자랑하느냐고 욕먹는다”며 “어디 가서 절대 이런 얘기 꺼내지도 말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놈의 한 시간 때문에 돈 쓰고, 속 태우고, 욕먹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아이는 엄마 얼굴 못 보고 날마다 울면서 말이다.

새삼 옛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건 9시 등교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은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올 3월 신학기부터 전체 초등학교(598곳)의 68.5%인 410개교에서 오전 9시 등교를 실시한다. 개학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아직 명단도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직장맘들만 애가 타서 혼자 알아보고 등교 도우미를 찾느라 난리법석을 떨고 있을 뿐이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좀 더 많이 자고 여유 있게 아침 식사를 챙겨 먹을 수 있는 ‘학생의 건강권’을 9시 등교의 명분으로 내세운다. 좋은 얘기다. 아침에 여유 있게 아침밥을 챙겨줄 수 있는 엄마를 두기만 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출근 시간은 그대로인데 아이의 등교 시간만 늦춰진 직장맘에게는 9시 등교가 느닷없이 겪어야 하는 또 하나의 장벽일 뿐이다. 일부에선 불과 몇십 분 등교 시간이 늦춰진다고 출근하는 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얘기한다. 봐줄 사람이 마땅치 않은데 어린 아이를 두고 일찍 출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미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한마디하자면, 대단히 큰 문제다. 오죽하면 『인구 감소의 공포』의 저자인 인구통계학자 마이클 타이털바움이 한국의 저출산 문제 해법으로 초등학교 등교 시간을 앞당길 것을 제안했을까. 누구를 위한 9시 등교인가. 정말 알 수가 없다.

안혜리 기획 에디터 hye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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