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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때는 장수 총리, 김영삼은 국면 전환용 … 대통령 따라 왔다 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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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호 03면

총리라고 다 똑같진 않다. 정권마다 나름 색깔이 있다. 대통령 정무비서관과 국무총리 정무비서관을 지냈던 이재원씨는 그의 저서 『대한민국 국무총리』에서 각 정부의 총리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역대 정권별 총리는 어땠나

▶그림자(이승만 정부): 1948년 제헌 헌법 기초과정에서 이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 고문인 올리버 박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한국 사람들은 국무총리를 원하지 않고 있소. 그러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선 권한 없는 총리가 있을 수 있소.” 이승만 정부 12년간 6명의 총리가 임명됐으나 철저히 총리의 탈정치화를 꾀했다. 초대 이범석 총리의 비서는 “총리의 역할이 특정 부처를 맡고 있는 장관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장수(박정희 정부): 박 대통령 재임 18년 동안 총리는 5명이었다. 평균 38개월로 어느 정부보다 길었다. 특히 박정희 정부 두 번째 총리였던 정일권씨는 무려 6년7개월을 재임해 역대 최장수 총리였다. 5명의 총리가 제각각 스타일을 갖춰 정통성 이미지 보완(최두선), 내각의 간판스타(정일권), 선거 관리(백두진), 여야 견제(김종필), 안정적 행정 관리(최규하) 등이었다. 쉽게 바꾸지 않고 장기간 재임시켜 행정부의 안정을 도모했다.

▶호남 배려(전두환 정부): 재임 7년간 7명의 총리가 거쳐갔다. 초기 두 명(남덕우·유창순)은 경제통이었고, 호남 인사도 3명(김상협·진의종·이한기) 임명했다. 유창순 총리는 장영자·이철희 어음부도 사건, 김상협 총리는 KAL기 피격, 노신영 총리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으로 물러났다. 이때부터 총리 해임을 경제·사회적 사건과 연결시켜 도의적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학자(노태우 정부): 서울대 총장 출신인 이현재 총리부터 강영훈-노신영-정원식-현승종 총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교육과 연관이 깊은 인물이었다. 군정 연장이라는 비난을 의식한 듯, 정치색이 옅은 학자를 중용했다는 평가다. 총리의 위상 강화를 위해 노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주 1회 총리와 직접 대면해 국정을 논하기도 했다.

▶단명(김영삼 정부): 국면 전환용 총리 경질이 많았다. 재임 5년간 6명의 총리가 교체됐다. 초대 황인성 총리는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된 후 농민의 강력한 반발 등을 고려해 사임했다. 대법관 출신 이회창씨는 두 번째 총리로 기용됐으나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 내용이 총리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것에 불만을 갖고 4개월 만에 사표를 제출했다. 후임 이영덕 총리 역시 성수대교 붕괴 등을 이유로 8개월 만에 떠나야 했다.

▶공동정부(김대중 정부): DJP 연합으로 탄생한 김대중 정부의 초대 총리는 당연히 김종필 당시 자민련 총재였다. 한나라당의 반발로 5개월간 ‘서리’ 꼬리표를 달았으나 1년10개월 임기 동안 국가정보원장이 한 달에 2회 총리실을 방문해 보고할 정도로 막강했다. 박태준 총리에 이어 세 번째 총리 역시 이한동 당시 자민련 총재 권한대행이었다. 2000년부터 총리 인사청문회가 시작됐다.

▶분권(노무현 정부): 노무현 정부 4명의 총리 중 가장 눈에 띄는 이는 이해찬 총리였다. “야구팀으로 말하면 대통령은 구단주이고 총리는 감독”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과거 청와대가 관장하던 정책 홍보 및 정책현안 조정 등을 총리실이 맡아 진행했다. 하지만 언론과 야당에 대한 공격,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의 고압적 태도 등으로 논란을 자초하기도 했다.

▶테마형(이명박 정부):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이던 2008년 초 “총리는 보조적 역할이 아니라 독자적인 업무를 갖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에 따라 초대 한승수 총리는 ‘자원외교’, 두 번째 정운찬 총리는 ‘세종시 수정안’의 해결사로 나섰으나 뚜렷한 성과는 내지 못했다. 세 번째로 기용된 김황식 총리는 2년5개월을 재임해 87년 직선제 도입 이후 최장수 총리가 됐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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