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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독·방탄…이런 총리 소용 있나 vs 대통령 쓰기 따라 보석될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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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부 총리는 정말 빵점이다."(김광웅 초대 중앙인사위원장)
"국무총리라는 자리 자체가 행정부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정두언 의원)
이완구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는 국민의 심정은 착잡하고 씁쓸하다. 삐뚤어진 언론관과 병역·부동산 의혹 등으로 만신창이가 된 후보자가 제대로 총리 역할을 할 지도 의문이지만, 행여 낙마해 또 다시 국정 공백이 생기는 것도 썩 내키진 않는다. "이토록 총리감이 없나, 정상적으로 군대 가면 어디 이상한 사람인가"라는 냉소가 팽배하다. 이 와중에 야당 대표는 "총리 인준을 여론조사로 결정하자"는 '반(反) 의회주의' 발언으로 또 다른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급기야 총리 임명을 놓고 정국이 20여일 이상 혼란을 빚자 "솔직히 누가 돼도 별 상관 없지 않은가. 이런 소동을 피울 바엔 차라리 없애는 게 더 낫다"라는 '총리 무용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독특한 한국식 국무총리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67년간 거쳐간 총리는 현 정홍원 총리까지 모두 42명. 총리가 없었던 때는 이승만 정부 6년(54∼60년)뿐이었다. 우리 정치사에서 미우나 고우나 총리가 국정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총리가 과연 필요한가'라는 근본적 의문이 들 게 된 건 박근혜 정부와 무관치 않다. 이완구 후보자 전까지 집권 2년간 네 명이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으나 3명(김용준·안대희·문창극)이 낙마했다. 무난하리라던 이완구 후보자까지 자질론, 신상털기식 청문회, 극한 여·야 대치 등이 겹치며 피로감이 쌓이자 "별 역할도 못하는 총리 뽑는 걸로 국력을 너무 낭비한다"는 여론이 확산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권한분산형 '책임총리제'는 이미 유명무실해졌다.

총리의 위상이 워낙 애매모호하다 보니 총리직 자체를 스스로 위축시켰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두언 의원은 그의 저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1948년 헌법 제정 당시 한민당의 내각책임제와 이승만의 대통령중심제를 혼합시킨 타협안을 만들다 보니 대통령제에서 국무총리라는 기형적 제도가 만들어졌다"고 전했다. 내각제의 수상과 대통령제의 정·부통령제를 뒤섞어 '대통령-총리'라는 어설픈 동거가 시작됐다는 얘기다. 민주정책연구원 한상익 연구위원은 "한국의 국무총리제와 유사한 제도를 운용하는 국가는 스리랑카와 남아메리카의 가이아나뿐"이라고 했다.

헌법상으로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장관의 임명제청권을 갖는다"(82조·87조)라고 명기돼 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없다. 그러니 김영상 정부에서 네 번째 총리를 역임한 이홍구 전 총리가 "사문화되다시피 한 총리의 각료 제청권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김광웅 명지전문대 총장은 "현재 한국의 총리는 세 가지 유형이다. 행사에 끌려가 축사나 하는 의전(儀典)총리, 대통령 대신 참여해 연설문 읽는 대독(代讀)총리, 사고 터질 때 물러나 주는 방탄(防彈) 총리"라고 했다. 정두언 의원 역시 "인사권과 예산권 없이 어떻게 행정 각 부처를 통할하겠는가. 법적으로만 2인자였지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국정원장 혹은 실세 장관보다 실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허수아비 총리가 수두룩했다"고 전했다. 이명박 정부 두 번째 총리였던 정운찬 전 총리는 "사고 나서 물러나는 '책임 총리'가 아니라 권한 총리가 돼야 한다"고 토로했다.

"총리는 대가족의 맏며느리"
실질적 위상은 낮은 데 반해, 높아진 국민 눈높이로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는 데서 '총리의 딜레마'마저 발생하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제 아래에서 ‘계륵’ 처럼 추락한 총리직은 진정 없어져야 하는 걸까.
노무현 정부 청와대 정책실장이었던 김병준 국민대 교수(행정학)는 이런 일화를 들려줬다. "2005년 종합부동산세를 시행하려 하는데 반발이 극심했다. 청와대가 직접 나서기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다. 그때 이해찬 총리가 전면에 등장했다. 직접 기자회견을 하고, 관련 장관을 독려하고, 의회를 상대했다. 청와대는 마치 상관없다는 듯 '총리가 너무 과하다'라며 짐짓 모른 척 했다. 덕분에 법이 통과됐다."
이른바 '총리 총대론'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청와대 대신 짊어지고 해결사로 나서는 데 정부 2인자인 총리가 제격이라는 뜻이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명박 정부에서 정운찬 총리가 '세종시 수정안'을 들고 나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박근혜 대통령으로선 공무원연금개혁을 주도해 주길 바라는 뜻에서 이완구 후보자를 지명했을 것"이라며 "그러나 도덕성 시비에 휘말리며 첫 스텝부터 꼬이고 말았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국무총리』의 저자 이재원씨는 "총리란 대가족의 맏며느리"라고 규정했다. "엄한 시어머니의 속내를 다른 며느리에게 전하면서 쉽게 털어놓기 힘든 동서들의 사정을 대신 시어머니에게 전달"하는 중간자이자 완충적 역할이라는 것이다. 이씨는 "금고 열쇠는 내줄 수 없지만, 곳간 열쇠는 내주어야 맏며느리의 위상이 살고 집안도 평안해진다"고 전했다.
김병준 교수는 "이완구 후보자는 '대통령에게 쓴 소리를 하겠다'고 했지만 그게 총리의 본업은 아니다. 총리는 대통령의 뜻을 정확히 알고 수행하는 게 핵심이다. 그러려면 대통령이 총리에게 어떤 일을 맡으라고 분명히 전달해야 한다. 대통령 쓰기 따라 보석도 되고, 고물도 되는 게 총리"라고 했다. 이재원씨 역시 "총리 개인의 역량과 능력보다는 임명권자가 어떻게 활용하겠다는 의지가 총리 성공의 열쇠"라고 했다. 김광웅 총장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대통령 혼자 하는 건 무리다. 무거운 짐을 나눠야 한다. 그럴 때 총리만한 인물이 없다. 총리에게 적절한 임무를 부여하느냐가 정권의 성공과도 직결된다"고 전했다.

한편 이완구 후보자 인준안은 16일 국회에서 처리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인준안이 통과될 경우 빠르면 17일 청와대와 내각의 후속 인사가 발표될 예정이다. 김기춘 비서실장의 교체가 유력한 가운데 후임 비서실장으론 권영세 주중대사,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현경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황교안 법무부 장관 등이 거론되고 있다. 해수부·통일부 등 소폭 개각도 예상된다. 지난해 말 청와대 문건 유출 파문 이후 3개월간 빚었던 국정난맥을 매듭짓고 본격적인 집권 3년차를 출범시키겠다는 게 청와대의 복안이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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