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3) 제80화 한일회담(42) 평화선 선포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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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평화선이 선포된지 십수년 후, 한일국교정상화와 함께 이「해양주권선언」도 소리 없이 소멸되었다.
그러나 이 십수년 동안 평화선 문제는 다른 어떤 문제보다 한일회담의 핵심현안이었고 일본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것은 한일회당 의제가운데 유일하게 평화선 문제에만 일본의 이익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외교교섭만큼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 의 원칙이 철저히 적용되는 예가 없다는 얘기들을 한다.
일본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한일회담의 이해타산을 따지면 평화선 문제하나가 그들이 취할수 있는 유일한 이익이었다.
그들 생각에는 비록 약소국 한국의 가당치 않은「주권행사」였을지라도 그로 인해 수십만명의 서부일본 어민이 꼼짝없이 불이익을 당하는 현실 앞에서 일본측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협상 테이블에 나와 가장 정력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고 그 어떤 문제보다 우선적인 해결을 서둘렀다.
나는 애초부터 평화선 선포작업엔 깊이 관여한바 없고 그이후의 한일회담에서도 이 문제에 직접적으로 뛰어든 적은 별로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 회담과정을 통해 일본측이 다른 문제에 임하는 태도와 이 평화선 문제에 임하는 태도가 판이하게 다른 것을 지켜보면서 새삼 외교절충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주고 받는다」는 원리다.
한일회담이 타결되기까지 여러 차례의 결렬이 있었고 몇 차례의 파국이 있었지만 결국 타결의 종장까지 이르는 데는 이 평화선 문제가 실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야기를 다시 평화상 선포에 얽힌 당시의 상황과 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평화선 문제에 대한 전문가는 1차 예비회담개막 이후 선박분과위 대표로 일했던 지철근씨다.
지대표는 고향이 전남 고흥의 바다에 접한 곳으로 기억된다. 그는 일본 북해도 대학 수산학부를 졸업한 후 줄곧 수산계의 관료생활을 하면서 수산행정을 도맡아 왔다. 또 상공부 수산국장 당시 나와 함께 한일회담대표로 쭉 같이 일했고, 내가 한일회담에서 얼마간 손을 떼었을 때도 줄곧 이 문제의 한국대표로 활약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얘기하려는 평화선 문제는 직접 당사자인 지대표의얘기가 가장 정통할 것 같아 그의 얘기를 인용하겠다.
『평화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이른바「맥아더 라인」이야기를 먼저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이 항복한지 5일 후인 45년 8월20일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당국은 통치상의 필요로 모든 일본어선의 전면적인 행동정지를 명한데 이어 9월14일에는 목조선에 한하여 일본연안 12해리 이내의 조업만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이 조치에 당황한 일본측은 SCAP에 탄원해 한달 만에 약63만2천4백평방 마일에 달하는 일본연안의 어로권을 확보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최초의「맥아더 라인」이다.
그후 일본은 49년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어로구역을 확장하는데 성공해 총2백89만8백평방마일의 어장을 확보하게 됐다.
당초 SCAP당국이「맥아더 라인」을 설정한 목적은 물론 군사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주된 이유가 전전 일본어선의 세계 5대양에 걸친 분별없는 남획으로 인한 어족자원 고갈을 막자는데 있었다.
전전의 일본어업은 베링해·오호츠크해·사할린연해·발해만 근해·대만해협·한국연해·동지나해·황해·통킹만·인도양 등 가히 세계의 주요 어장을 휩쓸다시피 했다.
그러던 것이 패전으로 이 넓은 어장이 갑자기 「맥아더 라인」안으로 제한됨에 따라 과거의 원양어업 종사자나 연근해의 군소어업 종사자들이 함께 뒤섞여 무분별한 경쟁과 남획을 일삼게 됐다. 급기야는 이미 50년대초 일본 연근해 어장의 자원은 고갈 상태에 빠지게 됐다.
잡을 고기가 없어진 일본측은 SCAP당국과 계속적인 교섭을 시도,「맥아더 라인」의 확장을 꾀하는 한편 한국 수역에서의 불법어로를 서슴지 않고 자행하기 시작한 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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