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 복지' 재정 개혁 걸림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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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동석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민주화 이후 많은 정권은 대선과 인수위 과정에서 재정 총량의 한도를 인식하지 않았다. 성장률을 회복하면 재정 여력은 충분히 생긴다거나 아직까지 국가 재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등 여러 덕담에 취해 2월 말 정부 출범 직전까지 이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는다. 3월 초 정부조직과 인사를 정비하고 새로운 열정으로 국정을 설계할 때 비로소 국가 재정의 한계가 거대한 산처럼 새 정부의 앞길을 막아 선다.

 이때부터 집권세력은 재정 여력을 확보하는 은밀한 유혹에 빠져든다. 그것은 국민에게 ‘세금 인상’의 분노 어린 고통을 주지 않고 ‘재정사업 축소·폐지’의 살기 어린 갈등을 조장하지 않으면서 재정 여력을 확보하고 복지도 늘리는 것이다. 그 유혹은 곧잘 생소한 용어로 표현되지만 실상은 한결같다. ‘당장 지출하고 그 부담은 미래로!’ 이 유혹은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는 은밀한 덫이었음이 5년 후 또 다른 정부가 출범할 때 밝혀지고 만다.

 이런 폐습을 타파하고자 현 정부는 공약가계부를 발표했다. 향후 5년간 세출 조정 75조원(매년 15조원), 세입 확충 60조원(매년 12조원)으로 총135조원을 마련해 공약을 이행하겠다는 것이다. 이전 정부가 수립한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세출 조정으로 재정 배분을 변경하고 세입 확충으로 재정 총량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에 맞춰 복지의 틀도 구상했다.

 그런데 정권 출범과 동시에 두 가지 측면에서 공약가계부에 심각한 도전이 나타났다. 첫째는 이전 정부가 수립한 2013년의 예산과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재정 수입의 예측에 중대한 문제를 인식한 것이다. 국세 수입과 세외 수입이 비현실적으로 과다하게 계상된 것이다. 이 때문에 새 정부는 다급하게 세입 부족 12조원을 보전하는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다.

 둘째 측면의 도전은 새 정부가 공기업 부채를 통한 비정상적 재정 운용을 더 이상 답습하지 않겠다는 의지에 있다. 사실 이전 정부에선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재정사업을 공공기관에 떠넘기는 불합리한 관행이 팽배했다. 주요 공기업 10개를 기준으로 김대중 정부는 20조원, 노무현 정부는 120조원, 이명박 정부는 160조원의 재정사업을 공기업을 통해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중독성 강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야말로 재정 지출을 감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공약가계부의 내용은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다음과 같이 조정됐다. 우선 이전 정부에서 과다 계상된 국세 수입과 재정 수입을 매년 약 25조∼35조원만큼 하향조정했다. 이는 다양한 세입 확충으로 확보한 재원을 세입 결손에 우선 충당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추가적인 재정규모 확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기업을 활용한 비정상적 재정 운용의 관행을 감안한다면 매년 약 30조원의 지출감축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공약가계부의 기본 내용은 유지되고 있으나 그 정도와 규모는 여전히 많은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있다. 비과세·감면 축소, 지하경제 양성화, 금융소득 과세 강화라는 세정 개혁의 이 해묵은 과제는 세율 인상과 세목 신설 같은 증세의 유혹에 직면하고 있다. 또한 공기업을 감안한 실질적인 재정 총량이 감소함으로써 세출 구조조정의 절박함은 더해지고 있다. 산업·개발국가에서는 특정한 산업·기업·직업, 그리고 지역과 연계된 특정한 개인을 보호했다. 그러나 복지국가는 일반적 속성의 일반적 개인을 보호한다. 우리는 어떻게 큰 갈등 없이 복지국가의 지출구조를 만들어낼 것인가.

 한국형 복지국가라는 우리 시대의 과제는, 고부담-고복지와 저부담-저복지의 선택에 한정되지 않는다. 세정 개혁과 지출 조정의 미시적 과제 가 더 복잡하고 어렵다. 세율 인상과 같은 증세를 손쉽게 선택하는 것은 우리 앞에 놓인 개혁의 절박성을 이완시키는 것은 아닌가. 분주파부(焚舟破釜)의 의지가 없다면 세정개혁과 재정개혁의 첫걸음조차 내딛기 어려울 것이다. 복지 역시 세정·재정 개혁과 함께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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