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2)-제80화 한일회담(21)|수석대표 양유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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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승만대통령이 한일회담을 불과 1주일 남짓 앞두고 양유찬주미대사를 수석대표에 전격적으로 임명한 것은 이박사다운 포우이었다고나 할까. 하옇든 세간의 화제를 낳기에 족했다.
우선 뜻밖의 임명을 받았던 양씨의 후일담을 들어보자.
『주미대사로 근무한지 얼마안돼 나는 뜻밖에도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임명됐으니 빨리 귀국하라」는 본국정부의 훈령을 받았다.
솔직이 말해서 나는 이박사를 도와 독립운동을 한다고는 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바가 없었고 관심도 두고있지 않았던 관계로 무척 당황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이박사는 내가 일본을 전혀 모르기때문에 선입견없이 공정을 기할수 있고 영어회화가 유창하니까 당시 일본 정부를 움직이던 SCAP과의 막후접촉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일부러 나를 불렀던 모양이다.』
일본에 대해 관심도, 잘 알지도 못하던 양씨를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임명한 이박사의 용인술은 확실히 세인의 의표를 찌르는 행동이었다.
외교적인 감각으로 말한다면 이박사의 이같은 조치는 전장에 총을 두고 싸우러가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우리를 근반세기나 강박했고 또 비록 패전했다고 하나 노회하고 교활한 외교경험의 축적을 쌓은 강적이 아닌가.
이로 미루어보면 이박사는 SCAP이 기능을 하는 동안 유리한 상황에서 한일문제를 타결해야한다는 정세분석과 재일교포의 법적지위를 개선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현실적 여건 및 미국의 은근한 종용 등에 따라 한일회담개최에 마지못해 응했지만 애초부터 일본과 어떤 합의를 얻어낼 생각은 없었던 것같다.
그래서 반일감정이 충만하고 호방한 양씨를 택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양씨의 유창한 영어로써 일본인들을 압도해 버리도록 하자는 뜻이 이대통령의 속내에 있었던 것이다.
이대통령이 대표단의 일본출발 전날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한 대표에게 미화50달러를 주면서 양복·구두·모자를 새로 맞춰가라고 했던 에피소드가 있다. 미화 1백달러 이상의 지출은 꼭 자신의 서명을 받도록했고 1달러의 외화도 아끼던 이박사가 몸치장에 쓰라고 50달러를 선뜻내준 마음의 여유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양씨의 회고대로 이는 말할것도 없이 『한일회담에 나가 일본사람들에게 얕보이지 말고 잘 싸우라』는 이박사유의 격려였다. 이런 이박사의 실정이 일본을 전혀 모르는 양씨를 수석대표로 발탁한 배경이었던 것이다.
양씨가 귀국긴급훈련을 받고 도일 3일전엔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그가 6살때인 1903년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민간후 세번째의 귀국이었다.
양씨는 이박사가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와이의 코리언컴파운드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을때 그의 제자로 인연을 맺어 그후 이박사의 항일독립운동을 도왔다.
양씨에 대한 이박사의 신임은 아주 극진했다고 양씨 스스로가 회고할 정도로 이박사는 양씨를 아꼈다.
그가 주미대사에 발탁된 에피소드는 양씨의 회고에 따르면 이렇다.
『1951년 2월초 어느날 호놀룰루 총영사인 김용식씨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당시 호놀룰루시내에서 산부인과병원을 개업하고 있었고, 의사로서 상당한 명망을 얻고 있었던 때다.
김총영사는 물론 구면이긴 했다. 그러나 이날따라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대통령께서 양박사를 부르시니 부산에 좀 다녀와야겠다」고 하며 귀국을 권유했으나 무슨 일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김총영사의 귀국권유를 병원일을 핑계로 두번씩이나 따돌렸으나 세번째 한국왕복비행기표까지 갖고와서 강청하는 바람에 더이상 거절할수 없어 귀국했다. 이박사를 만나니 뜻밖에도 즉석에서 주미대사를 명해 어안이 벙벙해 거절했으나 간곡한 설득을 받고보니 대사직을 맡지 않을수 없었다.』
양씨는 이를 계기로 60년까지 주미대사, 65부터 72년까지 순회대사로 인생의 마지막부분을 우리 외교일선에서 활약했으나 75년초 겨울 타계했다
주미대사시절 양씨는 반일연설을 자주해 미국무성으로부터 여러차례 주의도 들은 것으로 알며 특히 그의 강인한 반일활동때문에 주미 일본대사가 네사람이나 본국으로 소환됐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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