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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재정 긴축 한다는 약속 지켜라” … 치프라스 “2차대전 배상금이나 갚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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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앙겔라 메르켈(왼쪽) 독일 총리가 지난주 기자 간담회에서 “그리스는 (긴축) 약속을 지켜라”라고 하자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8일 의회 연설에서 “전쟁배상금과 나치 빚이나 갚아라”라고 응수했다. [뮌헨·아테네 AP=뉴시스]

“구제금융 프로그램 연장은 없다.”

 채권국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말이 아니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의 말은 더욱 아니다. 채무국인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41) 총리의 선언이다. 그는 8일(현지시간) 아테네 의사당에서 운명적인 선언을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구제금융 연기 신청은 이달 16일까지 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 구제금융 프로그램은 이달 말(28일)에 끝난다”고 이날 보도했다. 구제금융 졸업이다. 축하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리스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스스로 자금을 조달할 형편이 아니다.

 그리스의 국가 신용등급이 디폴트(채무불이행) 직전인 B-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이날 영국 BBC와 인터뷰에서 “돈 떼일 위험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리스에 돈을 꿔주려고 하지 않으려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와중에 “만기 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치프라스의 말은 곧 자금난, 더 나아가 국가부도(디폴트)를 감수하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단 그는 “올 여름까지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합의가 보름 안에 도출될 것으로 확신한다”고는 말했다. 합의 상대는 트로이카다. 2400억 유로(약 298조원)을 빌려준 유럽연합(EU),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을 이르는 말이다.

 이날 치프라스 선언은 ECB 반격에 대한 응전이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지난 주 “그리스 국채를 담보로 시중은행에 긴급 자금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리스 은행권의 신용경색으로 이어질 수 있는 조치였다. 치프라스는 메르켈 독일 총리를 향해서도 강공을 폈다. 그는 “독일에 대해 2차 세계대전 배상금을 요구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나치가 그리스를 점령한 뒤 겉으론 빌린다면서 실제론 강제로 가져간 돈도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메르켈의 지난 주 발언에 대한 응수였다. 당시 메르켈은 “유로존 내에서 그리스 편은 없다”며 “그리스가 구제금융을 받으며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 가디언지는 “치프라스가 메르켈의 고집이 근거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두 세대(60년) 이상이 흐른 역사를 끄집어냈다”고 평했다. 실제 그는 이날 의회 연설에서 “역사와 우리 국민의 자존감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역사가 자신의 중요한 명분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치프라스는 지난달 총선 직후 독일이 1·2차 대전 배상금과 빚을 1953년 런던합의를 통해 탕감받은 사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너희도 받았으니 우리 빚도 깎아줘야 한다’는 식이었다.

 치프라스는 일요일 연설에서 전쟁 배상금만을 요구한 게 아니다. 그리스 전 정권과 트로이카가 맺은 핵심 구조조정 정책을 취소했다. 최저 임금은 지속적으로 올리기로 했고 면세 한도를 연간 소득 1만2000유로(약 1490만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민영화 계획도 취소했다. 치프라스는 “그리스 국민이 우리에게 위임한 것을 존중해 내린 결단이어서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니다”며 “EU가 요구한 긴축 조치는 끝났다”고 잘라 말했다.

 또 다시 공은 트로이카 쪽으로 넘어갔다.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달 11일 벨기에 브뤼셸에서 열리는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유로그룹)다. 야니스 바루 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이 참석한다. 영국 BBC 방송은 “진실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그리스가 굴복하던지 아니면 트로이카가 긴급 자금을 빌려주던지 해야 한다. 트로이카는 구제금융 마지막분인 18억 유로를 지급하지 않고 있다.

 극적인 타협이 이뤄질까. 일반적인 예상은 타협이 이뤄진다는 쪽이다. 그런데 그린스펀 전 의장이 이날 BBC와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는 “아무도 그리스에 돈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으니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는 시간 문제”라는 요지로 말했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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