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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의 불의떨치고 처가 택해 입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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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고흥반도의 관문인 벌교에서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고흥으로 가는 길을 따라 버스로 10여분쯤, 동강면사무소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비포장도로를 따라 10여리를 간다. 봉황의 머리같이 생겼다는 봉두산이 알을 품은 형세로 1백50여호 아늑한 마을이 나선다.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수리.
1백50여호 중 80여호가 고령신씨다 조선조 연산군 때 장성부사를 지낸 지지당 신정이 무오사와를 피해 벼슬을 버리고 처가가 있던 이곳에 터를 잡았다. 그런데 무오사와률 일으킨 장본인 유자광은 석의 아버지 자두의 외숙. 외가의 불의를 걷어차고 처가를 택한 것이 입향의 연유인 셈이다.
후손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조상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을 도와 왜적을 무찌르고 정유재란 때 전라우수사로 벽파진싸움에서 전사한 신여량장군.
신장군이 41세를 일기로 전사하자 선조는 『이제야 단용하려 했더니 영영 가버렸단 말이냐…』 하고 애통해했다고 한다.
병조판서를 추서하고 『주사고궤도』와『당포전양승첩도』를 그리게해 후손에 내렸단다. 마을 뒤 봉두산 중턱에는 2백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문중서당 화수헌이 인근의 명소로 꼽힌다.
옛날엔 멀리 순천·고흥 등지로부터도 유학생이 몰렸다고 자랑이다.
마을의 주업은 농업.
호당 평균8마지기의 논과 1천여평 가량의 방에서 벼농사 외에 고등원예와 비육우등으로 줄잡아 연간 3백만원의 수입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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